화가 김보희를 따라, 경이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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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보희를 따라, 경이를 향하여

더 네이버 2025-06-02 17:02:02 신고

김보희, ‘Towards’, 2025, 캔버스에 채색, 163×130cm.

김보희 작가와 반려견 레오. 

올해로 개관 55주년을 맞은 갤러리현대가 최근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바로 김보희 작가의 합류 소식이다. 이들의 첫 번째 협업은 얼마전 아트부산 2025에 마련한 작가의 솔로 부스였다. 대표 연작인 ‘Towards’의 신작을 비롯해 12점의 작품을 선보였고, 큰 관심 속에 모두 판매로 이어졌다. 
김보희는 특유의 생기 넘치는 색채로 자연의 생명력을 포착하는 아티스트다. 제주 바다, 무성한 원시림, 검은 반려견 레오가 있는 정원 풍경 등 자연과 제주의 일상을 화폭에 담는다. 19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쳐온 중견작가지만, 특히 지난 2020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Towards>가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팬데믹으로 방역 수칙이 엄격하던 시기임에도 전시를 직접 보려는 인파가 몰린 것이다. 이례적인 흥행을 두고 격리 기간이 지속되며 자연과 닿고자 하는 열망이 관객을 전시장으로 이끌었으리라는 분석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보희의 초록은 결코 튀는 법 없이 차분하지만 특유의 생명력으로 시선을 잡아 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 인간이 사라진 시대의 고요를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을 그저 평온하고 고요한 이상향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그곳은 조용하기만 한, 소음이 소거된 공간이 아니다. 인간이 없을 뿐 생의 기운이 충만한 숲은 새잎 돋는 소리,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 잎사귀 아래 작은 곤충과 미생물이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존재는 소음을 동반하기 마련이니 그의 작품을 가만 응시하면 온갖 분주한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듯하다. 그 주파수가 인간에게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꽃봉오리를 둘러싼 광휘, 씨앗을 어스름히 감싸는 묘연한 빛은 또 어떠한가. 넘실대는 생의 기운이 지친 심신을 북돋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무수한 작품이 걸린 아트부산 현장에서도 커다란 잎을 그린 초록 작품은 멀리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김보희, ‘Towards’, 2025, 캔버스에 채색, 117×91cm. 

(왼쪽) 김보희, ‘Towards’, 2025, 캔버스에 채색, 53×46cm. (오른쪽) 김보희, ‘Towards’, 2025, 캔버스에 채색, 162×130cm. 

계속되는 색채 실험 

작가가 다루는 주 소재가 자연이라면, 표현 기법은 한국화와 서양화를 아우른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일찍이 색채에 이끌렸던 작가는 학생 시절부터 자연스레 채색을 시작했다. 한국화에 채색을 하면 일본 화풍 같다고 비판받던 시기였다. 초창기에는 한지에 먹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아교에 분채를 섞어 칠했는데, 색을 겹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깊이 있는 색감을 구현했다. 하지만 한지가 쉽게 찢어지는 탓에 캔버스로 재료를 바꾸었다. 이후 캔버스가 동양화 안료를 흡수하지 못하자 아크릴과 유화 붓을 도입해 동양화와 서양화의 재료를 자유롭게 혼용하기 시작했다. 
아트부산에서 공개한 신작을 살펴보면 반려견 레오가 등장하는 친숙한 광경과 제주 바다, 열대 숲이 주를 이룬다. 자연은 변함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산이나 강, 주변의 자연은 예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저도 그중 한 사람일 뿐이지요.” 겸손하게 답변한 작가는 “다행히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네요. 50여 년 전 경기도 양수리의 강과 산을 지척에 마주하고 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래서일까. 공개한 신작 중 눈에 띄는 작품은 산을 따라 흐르는 강의 풍경화였다. 대표작인 초록과 파랑 작품 사이 검게 칠한 산, 흑백으로 표현한 강 어귀 풍경은 이질적이다. “동양화를 배우고 전공했기에 화선지와 수묵, 무채색 작품은 20여 년 이전부터 많이 제작했습니다. 다만 서양화 캔버스에 수묵화를 그린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1990~2000년대 실험의 연장선일까. 한지에 작업한 과거 수묵풍경화가 겹친다. 이는 “산골짜기와 굽이치는 강줄기를 보려고 여러 곳을 찾아다닌 결과물이다. 강원도, 충청도 등 여러 장소를 살피고 참고했지만 작품이 특정 지역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 나타나는 지리적 특성을 기반으로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장소를 그린 것에 가깝다. 

김보희, ‘Towards’, 2025, 캔버스에 채색, 162×30cm.

위안의 풍경 

제주 서귀포에서 산책 후 작업실로 향해 그림을 그리는 일상. 규칙적인 생활을 선호하는 작가는 늘 비슷한 일과를 보낸다. “오랜 습관이어서 자연스레 그리 되는군요.” 그의 작품에서 제주 풍경이 주를 이루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트부산에서 공개한 신작 속 바다 역시 제주다. 이미 오래 거주한 섬에서 여전히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는지 묻자 작가는 “매일매일의 주위 풍경이 늘 새롭”노라 답했다. 길들지 않는 눈이야말로 시각예술가에게 필수적인 장기 아닐까. 여러 점의 바다 그림을 살펴보며 이 풍경은 협재일까, 표선일까, 동서남북 중 어디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는 관객의 특권이다.
2017년 퇴직 이후 작가는 제주에서 더 활발히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 거센 파도 치는 바다를 그렸다면, 시간이 지나며 그의 화폭 속에는 정적이고 평온한 풍경이 남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 같아요. 산더미같이 큰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고 부서지는 모습에 젊은 시절만큼 감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작은 것들 하나까지 사랑하게 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껴요.” 2020년 전시가 열풍을 일으킨 까닭은, 어쩌면 유례없는 세계적 재난으로 불안에 떠는 젊은 세대에게 그 담담한 풍경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쉽게 낙관을 말하는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많은 일을 겪은 끝에 평온을 찾은 이의 존재감에서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작가 김보희가 매 순간 새로이 자연에 경이를 느끼고 그 여운을 작품에 남기는 한 우리는 그의 풍경을 향해 갈 것이다.  

자료 제공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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