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기억 - 아트퍼니처 & 비주얼 아트디렉터 서수현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수십 번 고쳐 쓴 습작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3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막막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만한 동시대 창작자들의 습작을 엮었다. 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HOUSE IN THE HOUSE 전시의 메인 집 작품.
서수현은 아트퍼니처 작가이자 아트 디렉팅 그룹 수우아트의 디렉터로서 세븐틴, 에스파, 라이즈 등의 아티스트와 협업하기도 했죠. 가구와 오브제를 예술에 접목시키는 아트퍼니처라는 분야에 발을 들인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패션과 가구를 함께 공부했어요. 패션과에서 배운 요소와 기술을 가구에 적용해 저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 시작했죠. 아트퍼니처는 인간의 실생활과 예술을 연결시켜주는 조형 언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작업을 통해 나 혼자만 하는 상상을 끌어내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것 같아요.
평소 작가는 단순하지만 위트 있는 형태와 원색 컬러를 활용해 동심을 떠올리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데 영향을 받는 아티스트가 있을까요? 컬러감과 조형감에 주목하는 작가들에 영향을 받았어요. 컬러 대비가 뚜렷한 쿠사마 야요이, 유럽의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작가 에르빈 부름, 펑키한 스타일의 벨기에 디자이너 월터 반 베이렌동크.
작가의 작업 역시 컬러감과 다양한 소재에서 오는 조형감에 주목하고 있죠. 요즘 작가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건 무엇인가요? 요즘엔 하나의 키워드에서 여러 갈래로 상상을 뻗어가요. 단어를 무작위로 뽑아서 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주제로 스케치하죠.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문장들이 나오고 그 문장들로부터 엉뚱한 상상이 떠오르기도 해요. 요즘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로부터 아이디어를 뻗어가는 과정에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HOUSE IN THE HOUSE 전시 포스터.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는 개인작업과 커머셜 프로젝트를 오가며 동심을 떠올리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마음을 다시 다잡기 위해 꺼내보는 습작이 있다면요? 모든 작품이 동심을 주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개인 작업들로 환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중 하나가 틈 시리즈예요. 저는 많은 것을 정의 내리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정작 제 스스로는 정의 내리지 못했죠.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까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스스로의 애매모호함에 괴로웠어요. 그러다 알았죠. 아, 나는 명확한 것들 사이의 작은 ‘틈’에 있는 존재구나. 나무의 틈, 돌의 틈에서는 식물이나 버섯같이 예기치 못한 존재들이 우연히 피어나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볼록한 형태들 사이로 털뭉치가 비집고 나온 듯한 ‘틈’을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작업하는 동안 틈이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인 동시에 어떤 생명을 품은 가능성의 공간이란 걸 확인했죠. 그러면서 틈 안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HOUSE IN THE HOUSE 작업 스케치.
이번 칼럼의 기획 의도가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습작이란 생각에서예요. 지금의 작품 스타일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나 습작은요? 작품에 대한 애정은 고생과 비례하는 것 같아요. 모든 작품에 애정이 깊지만 특히 ‘HOUSE IN THE HOUSE’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집, 가구, 오브제 같은 일상의 사물들을 낯선 재료와 형태로 재구성한 전시였는데요.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을 만들기 위해 골조가 되는 나무를 깎고 그 위에 옷처럼 입힐 원단을 자르고 원단 안에 솜을 넣어 완성했어요. 한 달 내내 잠을 줄여가며 정말 매일매일 작업에 몰두했어요. 또 ‘My very first exhibition 2020’을 만들었을 때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은 알아주는 분들도 많지만, 아무도 저를 찾아주지 않을 때도 있었죠. 고민이 깊어진 시기에 나 혼자서라도 개인전을 열어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팝업북이에요. 당시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작업했던 습작을 볼 때면 힘들었던 제 모습이 떠올라 혼자 피식거려요. 이보다 저에게 귀한 작업이 또 있을까도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