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자 감독, 이한주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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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이자 감독, 이한주가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

바자 2025-03-29 08:00:00 신고

3줄요약

ACTOR'S CHAIR 이한주


인터뷰 내내 ‘사랑’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흘렀다. 배우 이한주는 영화를 숨길 길 없이 사랑하고, 영화를 통해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가 떠올리는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사랑을 빼고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들이다. 이 사랑은 때로 회의적이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더 믿을 만하다.


니트 톱은 Marni. 셔츠는 Juun.J. 팬츠는 H&M. 스니커즈는 Nike.


하퍼스 바자 이한주라는 배우를 각인하게 된 계기는 김현정 감독의 독립영화 〈흐르다〉였어요. 믿을 만한 사람인 듯하다가도 일견 교활한 면모나 냉랭함마저 느껴졌어요.

이한주 오, 좋은데요. 그러면 그 영화에서 저를 처음 보신 건가요?

하퍼스 바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미 수많은 출연작을 봤더라고요. 뒤늦게야 그 배우가 이 배우였구나, 하고 머릿속에서 대통합이 일어난 거죠. 굉장히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이한주 그런 말은 배우에게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스스로도 본인의 느낌을 잘 알고 있죠? 그것을 강화하려고 하는 편인가요?

이한주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듣기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어떤 옷을 입느냐, 머리 모양이 어떠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떤 희열을 느꼈어요. 아무튼 그 말이 엄청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왜 그게 그렇게 좋았을까요?

이한주 인정 욕구가 굉장히 강했나 봐요. 엄마한테도 항상 인정받고자 했고. 그렇다고 화목하지 않은 집안은 아니었습니다.(웃음)

하퍼스 바자 주로 어떤 영역에서 인정받고 싶어 했나요?

이한주 그냥 뭐든요. 공부든 집안일이든. 그래서 어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재롱떠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면 막 환호해주니까.(웃음)


하퍼스 바자 학창 시절은 어땠어요?

이한주 학교에서 하는 장기자랑이란 장기자랑은 다 나갔죠. 중학교 때 밴드부도 했어요. 베이스 기타를 쳤는데, 무대에 올라 주목받는 걸 즐기는 편이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를 예고로 진학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죠.

하퍼스 바자 어떤 식으로요? 전개상 시련과 위기일 것 같은데.

이한주 맞아요. 제가 다닌 학교는 50명이 3년 동안 한 반이었어요. 저마다 개성이 다양한 애들이었는데 그 애들을 3년 내내 봐야 하는 거죠. 그때 처음으로 경쟁을 경험했고, 빈부 격차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꼈고, 정말 많은 감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그럼에도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꺾이지 않았나요?

이한주 네, 그땐 그 일들을 그렇게까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게 그저 좋았나 봐요. 그렇게 시작한 분야가 뮤지컬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왜죠? 노래에 자신이 있었나요?

이한주 왜냐하면 노래는 연기에 비해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보여줄 수가 있잖아요. 연기에는 정답이 없는데, 노래에는 그래도 조금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안 되던 고음도 노력하면 올릴 수 있는 거니까. 열심히 노래해서 그걸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서도 공연을 하는 전공을 선택하게 됐죠.


하퍼스 바자 뮤지컬로 데뷔했잖아요.

이한주 맞아요. 데뷔작이 〈맨 오브 라만차〉인데, 그 작품의 김문정 음악감독님이 당시 담당 교수셨어요. 교수님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격해서 스물여섯 살 때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거죠. 학교 학생 중 외부에서 공연한 최초의 학생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어떤 역할이었어요?

이한주 당시 주인공은 황정민 선배님이었고, 저는 앙상블이라고, 뒤에서 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역할이었어요. 그렇게 2~3년 뮤지컬 무대에 오르다 보니 영화가 정말 하고 싶더라고요. 실은 어릴 때부터 영화에 나오는 게 꿈이긴 했거든요.

하퍼스 바자 그런데 왜 영화 쪽으로 도전해보지 않았어요?

이한주 스스로 부정했던 것 같아요. 나같이 생긴 사람은 영화배우를 할 수 없다고 지레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거든요. 아직도 엄마는 이해를 못하시는데, 어릴 때 화장실 불을 끄고 씻었어요.


가죽 재킷은 51Percent. 티셔츠는 Juun.J. 팬츠는 ADSB Andersson Bell.


하퍼스 바자 그 정도로 자기 얼굴을 보기 싫었어요?

이한주 네, 사춘기라 더 그랬던 건지….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두면 거실의 빛이 역광으로 들어오거든요. 그때는 내가 좀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하면서.(웃음)

하퍼스 바자 와….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굉장히 절실한 문제였네요.

이한주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저를 항상 목도리로 얼굴 반을 가리고 다니던 애로 기억해요. 예고에는 멋지고 잘생긴 친구가 정말 많고, 비싸고 좋은 것들을 들고 다니는 친구도 많고, 그 속에서 엄청 위축됐던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이제는 그런 마음으로부터 벗어났죠?

이한주 그럼요.

하퍼스 바자 계기가 있나요?

이한주 영화를 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한 작품 한 작품 찍으면서요. 처음에 단편영화 찍을 때는 모니터도 못 봤어요.

하퍼스 바자 당연히 그랬겠네요.

이한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 속 인물이 나로 보이지 않고 캐릭터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마음이 조금 놓이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그래서 매 작품에서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일이 유독 좋은가 봐요.

이한주 맞아요. 그래서 더 그런 방향을 추구하나 봐요.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나로서가 아니고 그 인물로 보였으면 좋겠는 거죠.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큰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아마 그 출발은 나를 부정하는 마음은 아니었을 거예요. 오히려 나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되면서 스스로를 대하는 시야가 넓어진 게 아닐까요.

이한주 그런 것 같아요. 저를 좀 더 좋아하게 된 거죠. 모니터를 보면서 이럴 때는 나도 좀 멋있구나, 느끼기도 하니까.(웃음)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배우의 역할이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 인물을 맡은 배우가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으로 나와줘야 해요. 피사체로서 미장센을 만드는 건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관객들은 또 그걸 잘 알아차리는 것 같고요.


하퍼스 바자 저도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미장센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영화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는 것도 힘들어하던 배우가 어떻게 영화 현장에서 자유롭게 되었는지 궁금한데요.

이한주 〈오두막〉 〈파테르〉 등 초기작들이 친동생(이상환 감독)과 같이 찍은 작품이에요. 특히 〈오두막〉은 동네 친구들까지 합세해 네다섯 명이서 찍은 영화예요. 잘 갖춰진 환경에서 한 작업은 아니죠. 그래서 오히려 좋았던 것 같아요. 원하는 대로 막 해볼 수 있었으니까. 화면 속 내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어요. 그게 참 좋았죠.

하퍼스 바자 그때의 상태가 좋았군요.

이한주 맞아요. 온전히 즐기면서 영화를 찍었던 유일한 시간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작년에 장편영화 〈파동〉을 연출해서 세상에 내놓기도 했잖아요.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도 초청을 받았죠. 이 작업 이후 정체성에 대한 변화를 느끼나요?

이한주 음…. 내가 배우인가 감독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저 영화를 만드는 게 좋은 사람이에요. 남의 현장에도 되도록 많이 놀러 가고 싶고. 현장에 있을 때 정말 많은 에너지를 받거든요.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편집해보고 싶은 욕망도 있고 그래요. 이젠 영화 만드는 것 자체가 재밌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만 살 때보다 영화를 대하는 마음도 훨씬 가뿐해졌다고 할까요.

하퍼스 바자 배우의 길을 걸을 때는 그것만이 전부라고 느꼈을 테니까요.

이한주 맞아요. 계속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컸던 것 같아요. 나 혼자 몸이 아니라 소속사도 있고,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거기서 오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나라는 사람을 편안하게 드러내는 게 많이 어려웠어요. 하지만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은 편안해진 것 같아요.


재킷, 팬츠는 Stu. 슬리브리스 톱은 H&M. 스니커즈는 Mihara Yasuhiro


하퍼스 바자 배우로서 지금 어떤 시기에 놓여 있는 것 같나요?

이한주 많은 배우들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연기가 있고, 저도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퍼스 바자 이를테면 그게 어떤 건가요?

이한주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약간… 다 자신 있어요.(웃음) 어떤 걸 하더라도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배우들의 고민은 늘 이런 거예요.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 그러다 보니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 판을 짜보자는 마음에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도 있었죠. 이게 배우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에요.

하퍼스 바자 때를 모른다는 것요.

이한주 그렇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요. 지금은 그 시간에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최고인데요? 〈파동〉 전에 찍은 단편영화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한주 어쩌다 보니 세상에 나오는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최근 후반 작업을 마쳤고, 영화제에 출품했어요.

하퍼스 바자 제목이 〈아침이 밝아올 때〉예요. 어떤 내용이에요?

이한주 연기학원 강사와 학생이 주인공이에요. 제가 부산에 살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울산의 연기학원에서 4년 정도 수업을 했거든요. 당시의 애제자가 외모나 목소리가 전형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또 외모 콤플렉스가 강해서 꼭 어릴 때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때 저는 배우로서 일이 거의 없었고 오디션에도 계속 떨어지던 시기였는데, 그 학생이 저에게 오히려 용기를 많이 줬어요. 그런데 제가 학원 상황에 떠밀려 그 친구에게 아주 미안할 만한 선택을 하게 됐어요. 그 친구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예요.

하퍼스 바자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네요. 제목도 좋고요.

이한주 제목을 들으면 언뜻 희망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미친 듯이 고민을 한다, 는 느낌이에요.

하퍼스 바자 〈파동〉도 삶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묵직한 영화였고, 〈아침이 밝아올 때〉도 상당히 성찰적인 느낌이 들어요.

이한주 영화를 만들 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단 형식적 측면을 먼저 떠올리는 편이에요. 거창한 의도를 담거나 하진 않아요. 그런데 이야기를 구상하다 보면 늘 그 안을 관통하는 테마가 같더라고요. ‘사랑’요. 저도 몰랐거든요. 글을 쓰다가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영화를 한다는 건 나를 계속 알아가는 과정인 거죠. 주변을 더 많이 돌아보게도 됐고,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황에 큰 영향도 받고요. 그러다 보니 별수 없이 제 영화에 삶을 대하는 저의 태도가 자연스레 담기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사실 적나라할 만큼 드러나죠.

이한주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돼요. 배우도 그렇잖아요.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연기에 묻어나잖아요. 그 때문에 좀 더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어떨 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나요?

이한주 일상 속에서 가장 흥분될 때가 내 안에서 재밌는 이야기가 떠올랐을 때예요. 그게 꼭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혼자 글 쓰고 상상하고 그러는 게 지금 저에게 가장 재밌고 건강한 일인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연기에 대해 떠올릴 때면 어떤가요?

이한주 이제는 좀 느긋해졌어요. 50대가 되고, 60대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을 것이고, 연기하는 건 언제나 재밌으니까요. 연기할 생각을 하면 늘 흥분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퍼스 바자 이 칼럼의 공통 질문이에요. 배우가 된 후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이한주 엄청 그런 것 같은데요? 배우 일을 하면서 저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게 됐어요. 그전에는 나를 부정하고 싶었고,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스스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건가요?

이한주 그런 거죠. 그러다 보니 나보다는 남한테 맞춰주는 태도가 강화되고, 그러면 또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니까 거기서 인정욕을 채우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거죠. 한때는 그게 내 삶의 본질이었던 것 같은데, 영화를 하면서 확실히 달라졌어요.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고, 특히 독립영화를 통해 다양한 삶을 경험하게 됐어요. 많이 알게 됐다는 건 어쩌면 내가 나와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일 수 있잖아요. 그렇게 나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 속에서 성장하게 된 것 같아요. 영화를 하면서 물론 상처도 받고 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많이 나를 좋아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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