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HBM4 공급을 앞당겨달라는 엔비디아의 요청에 당초 계획보다 빠르게 절차를 개시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두 회사간 ‘밀월’이 5세대 HBM3E에 이어 HBM4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이닉스반도체 인수 이후 이어진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뚝심 투자’ 역시 한몫했다는 평가다.
◇SK하이닉스, 세계 첫 HBM4 샘플 공급
19일 SK하이닉스에 따르면 이 회사는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6세대 HBM4 12단 샘플을 출하해 고객사들과 인증 절차를 시작했다. 양산 준비 역시 올해 하반기 중으로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이천 공장과 청주 공장에서 HBM4를 나눠서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고객사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엔비디아와 브로드컴 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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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샘플로 제공한 HBM4 12단 제품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속도를 갖췄다. 12단 기준으로 용량도 세계 최대다. 신제품은 처음으로 초당 2TB(테라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대역폭을 구현했다. HBM 제품의 대역폭은 HBM 패키지 1개가 초당 처리할 수 있는 총 데이터 용량을 뜻한다. 이는 풀HD급 영화(5GB·5기가바이트) 400편 이상의 데이터를 1초 만에 처리하는 수준이다. 5세대 HBM3E 대비 60% 이상 빨라진 것이라고 회사 측은 전했다.
SK하이닉스는 아울러 앞선 세대를 통해 경쟁력이 입증된 어드밴스드(Advanced) MR-MUF 공정을 적용해 HBM 12단 기준 최고 용량인 36GB를 구현했다. 이 공정을 통해 칩의 휨 현상을 제어하고 방열 성능을 높였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22년 HBM3를 시작으로 지난해 HBM3E 8단, 12단 역시 업계 최초 양산에 성공하면서 시장을 주도해 왔는데, HBM4까지 경쟁사들보다 한발 앞서나가게 됐다. 삼성전자는 아직 HBM3E마저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하지 못했다. HBM4 양산은 올해 하반기로 계획하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다소 불투명하다. 마이크론은 2년 내 HBM4 양산을 목표로 세웠다. 김주선 SK하이닉스 AI인프라 사장은 “업계 최대 HBM 공급 경험에 기반해 앞으로 성능 검증과 양산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엔비디아 루빈에 SK HBM4 탑재 유력
SK하이닉스의 이날 발표가 주목받는 것은 젠슨 황 CEO가 간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연 ‘GTC 2025’에서 차세대 AI 칩 로드맵을 밝힌 직후이기 때문이다. 황 CEO는 내년 하반기에는 루빈을, 오는 2027년에는 ‘루빈 울트라’를, 2028년에는 ‘파인먼’을 각각 선보일 예정이라고 전했다. 루빈만 해도 현재 엔비디아 최신 칩인 ‘블랙웰’보다 추론 성능이 두 배 이상 향상된다.
루빈은 처음 HBM4가 탑재되는 제품이다. SK하이닉스가 이날 공개한 HBM4가 루빈부터 적용될 게 유력하다.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들이 나올수록 HBM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경우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에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일단 SK하이닉스가 한발 앞서나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실제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는 공고한 협업 관계를 유지해 왔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11월 “황 CEO로부터 HBM4 공급을 6개월 당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전했다. SK하이닉스에 조기에 샘플을 공급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두 회사에 더해 HBM4부터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TSMC까지 협업에 나서며 ‘삼각 동맹’이 본격화하는 것도 변수다. SK하이닉스는 이미 TSMC와 HBM4부터 협업을 강화하자는 내용의 MOU를 맺었다. 양사는 HBM 패키지 내 최하단에 탑재되는 베이스다이(Base Die)의 성능 개선에 나선다. 베이스다이는 그래픽저장장치(GPU)와 연결돼 HBM을 컨트롤하는 역할을 한다. SK하이닉스는 HBM3E까지는 자체 공정으로 베이스다이를 만들었으나, HBM4부터는 TSMC의 로직 선단 공정을 활용할 계획이다.
또 다른 업계 고위관계자는 “HBM의 성공에는 SK그룹의 전폭적인 지원도 주요하게 작용했다”며 “최태원 회장의 공격적인 투자가 빛을 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SK그룹 인수 전 하이닉스반도체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열악했는데, SK그룹은 편입 직후인 2012년 당시 메모리 업황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투자를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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