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더위에 지쳐 들른 편의점.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 가격이 무려 3000원으로 오른 사실에 무척 놀랐던 적 있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지만 얼음 조각이 3000원이나 하다니… 반쯤 열렸던 지갑이 슬그머니 닫히고 편의점에서 나오면서 깨달았다. 이건 불황을 알리는 수많은 시그널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불경기를 암시하는 경고등은 이미 일상 곳곳에 켜져 있었다. 늦잠 잔 날 부랴부랴 올라탔던 택시 기본요금, 습관처럼 주문한 배달음식에 붙은 배달료를 볼 때마다 너무나 올라버린 물가에 새삼 놀라곤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이 흐름의 시작은 팬데믹이었다. 인건비와 원자재값이 치솟을 때 경제대공황을 막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갖 경기 부양책이 쏟아져 나왔고, 그 부작용으로 주식과 코인 시장이 얼마나 폭등했던가. 그렇게 불어닥친 버블 경제는 이제 세계 정세를 위협하고 있다. 뉴스에서는 이 거품이 수그러들 때까지 기약 없는 경기 억제 정책이 계속될 전망이라는 발표가 이어진다. 그야말로 뜨겁게 끓어오르던 경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고 있는 걸 체감한다. 불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불황의 적신호는 패션 신에서도 포착됐다. 화려한 패션 판타지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자연스럽게 현실과 실용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이 런웨이에 드리운 것.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언더커버다. 지난 3월, 파리에서 열린 언더커버 2024 F/W 쇼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감독 빔 벤더스가 직접 쓴 시를 낭독하는 음성과 함께 펼쳐졌다. “항상 그렇듯 그녀는 어둠속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 문을 닫고 불을 켠다. 늘 그렇듯 아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한다. 자신은 커피 한 잔만 마신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빔 벤더스의 시는 주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여성의 일상을 묘사했다. 그에 맞춰 흐트러진 헤어스타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의 모델들이 카디건과 청바지, 회색 후디드 톱과 트레이닝팬츠 같은 일상적인 옷을 입은 채 바게트와 요가 매트, 꽃과 와인이 든 슈퍼마켓 봉투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 풍경은 우리네 평범한 모습을 런웨이로 옮긴 듯했다. 그뿐 아니다. 드리스 반 노튼 역시 회색 트레이닝 톱과 저지 스커트를 매치한 일상적인 세트업을 선보였고, 미우미우 쇼에는 여의도 직장인의 패딩 재킷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푸퍼와 플리스 톱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중고거래 사이트로 잘 알려진 이베이의 로고를 더한 발렌시아가의 터틀넥 톱도 이번 시즌 패션 신에 스며든 리얼리즘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불경기가 찾아왔을 때 하이패션이 현실세계를 조명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약 10여 년 전, 패션 트렌드를 강타했던 키워드 ‘놈 코어(Nomcore)’도 그랬다. 평범함을 뜻하는 노멀(Normal)과 철저함을 뜻하는 하드코어(Hardcore)의 합성어로, 늘 검은색 풀오버에 청바지를 입었던 스티브 잡스의 패션처럼 지극히 평범한 스타일에서 세련된 밸런스를 찾는 데 집중했던 트렌드다. 놈코어란 단어는 2013년, 뉴욕의 트렌드 예측 기관 케이-홀(K-hole)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리스가 국가신용등급평가에서 국가 부도를 의미하는 C등급을 맞으며 유로존 경제 위기가 시작된 건 우연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경제가 어려울 때 사람들은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즐거움을 가장 먼저 포기한다. 예를 들면 이국적인 해외여행이나 비싸지만 맛있는 디저트, 특별한 날을 위한 근사한 하이힐 같은 것들 말이다. 또 경기가 나빠지면 사람들은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소비심리를 무장한다. 이럴 때 이들의 마음을 여는 건 오직 합리성이다. 실용적이고, 일상에서 활용도 높고, 게다가 유행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비로소 소비를 시작한다. 지금 패션이 현실 세계에 집중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화려했던 패션 판타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 패션이 도래했다고 단정 지을 일도,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 결국 합리적인 소비습관은 장기적으로 우리 삶을 더 건강하게 만들 테니까. 팬데믹 시절, 한국인의 1인당 명품 소비가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는 발표를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동안 우리는 필요보다 쾌락에 집중한 소비에 너무 익숙해진 건 아닐까. 최근 명품 쇼핑으로 유명한 모 유튜버가 “나는 겉만 번지르르한 알거지였다”며 명품 쇼핑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1500만 원 상당의 에르메스 백을 구입하고도 포장조차 뜯지 않고 방치할 만큼 쇼핑 중독에 빠졌다는 그는 “솔직히 말하면 과시욕이었다. 심심하거나 외로울 때 돈을 쓰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용기 있는 고백을 했다. 앞으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원래 있던 물건을 소중히 아끼면서 잘 쓰겠다는 그의 다짐에 수많은 사람이 응원과 격려를 보낸 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트멍은 2024 F/W 패션쇼에서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려고 없는 돈까지 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We buy things we don’t need with money we don’t have, to impress people we don’t like)”라는 문구를 프린트한 티셔츠를 공개하며 요즘 시대의 도파민 소비를 꼬집었다. 쇼핑의 즐거움은 새롭고 자극적이지만, 합리성을 잃은 무절제한 소비는 개인의 위기를 불러올 뿐 아니라 국가적인 경제 위기와 자원 낭비, 나아가 환경오염으로도 이어진다. 이번 시즌 유난히 옷의 소재와 본질, 기능과 실용에 집중하는 패션계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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