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마종기 시인께 - 유희경 시인

[신간을 기다립니다] 마종기 시인께 - 유희경 시인

채널예스 2022-07-05 10:48:53 신고

신록의 계절마저 지났습니다. 선생님. 모든 것이 우거져 있습니다.

평소 간단한 연락 한 번 드리지 않는 자가 편지의 서두에 계절감을 담다니 죄송할 뿐입니다.

선생님께선 저의 무례를 너그러이 받아주시지요. 이따금, 서운함을 뒤춤에 감추고 계신 것은 아닐까 궁금해집니다. 저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선생님의 등 뒤를 훔쳐보는 마음이 되곤 합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부끄러움은 그로부터 비롯되지요.

그렇다 해도 과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모두가 서로의 건강을 빌어주는 시기에 메일 한 통 드리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게 선생님의 안부를 전해 주는 이들은, 선생님께서 너의 안부를 궁금해하신다고, 늦지 않게 메일을 드리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 했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혹독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낙담에 낙담이 더해지는 동안 저는 지금 운영하고 있는 이 작은 서점에 홀로 앉아 관둘 생각만을 했습니다. 더러 서점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 싶기도 했지요. 손아귀에 힘을 줄 때, 그 힘이 절로 풀려나갈 때 실은 자주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멀리나마 선생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은 말도 글도 되지 못했습니다.

우는 소리와 뒤섞일까 두려웠습니다. 혹시 진짜 울기라도 한다면 선생님과 저의 물리적인 거리가 새삼 확인되었겠지요. 선생님께선 그 누구보다 걱정을 하실 것이며 저는 실체도 없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질 테고요.

간신히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잘 감출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은 금방 들통이 났겠지요. 아무래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옛말을 핑계 삼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이 기회를 빌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이곳은 이제 와 안녕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녹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하고, 그늘 안팎의 기온 차가 극명해질 때면 저는 또 선생님 생각을 합니다. 항상 이맘때면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출퇴근을 위해 오가는 길에는 선생님께서 머물곤 하시던 숙소가 있습니다. 정확히 중간쯤입니다. 그러니 또 선생님 생각은 자동입니다.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지는 십 년도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처음 뵈었던 것은 2008년 늦봄. 선생님께서 제가 일하는 출판사에 방문하시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에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고 선생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반가움을 전하시던 음성.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내밀어 주셨던 두툼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던 손.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을 잡았습니다. 내가 읽었던 그 아름다운 시를 적어낸,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제겐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기회이고 영광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말씀드린 적이 없지요. 그런 얘기를 했다간 손사래를 치실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진심은 간직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가끔 서랍을 열어, 그것을 확인합니다. 거기에는 그날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따금 그것을 꺼내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아시게 될 텐데요. 지금 제가 여기서 선생님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하여 제게 초여름은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을 뵙기 전, 뵌 후에 꺼내 읽곤 하는 선생님의 시이기도 합니다. 



“멀리 있으면 희고 푸르게 보이고 /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마종기, 「밤 노래 4」,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이는 그 시들은 꼭 선생님이어서 저는 그 앞에서 정중해집니다. 그 앞에서 천둥벌거숭이 어린아이가 되고, 그 앞에서 시를 알고 싶어 난 열에 웃통을 벗는 청년이 됩니다. 의젓한 시인이었다가,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고뇌에 빠지는 슬픈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한세월 살아본 노인처럼 시집을 덮어놓게 됩니다. 한동안 선생님께서 당신의 조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때에도 이 습관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집은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 2015). 선생님의 시집 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집입니다. 어찌 제가 선생님의 시집 중 어느 하나를 고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자꾸 이 시집에 손이 가는 것은 이 시집의 과정 과정을 제가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각각의 시들 구석구석을 샅샅이 읽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집의 제목을 차용한 시를 쓴 적 있습니다. 「마흔두 개의 초록」이라는 시는 이 시집의 제목을 결정하시던 당시 선생님과 있었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그날은 선생님과 함께 한 시인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초여름 저녁이었고,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제법 후텁지근했습니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 있었지요. 선생님께선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초록 잎을 보곤 말씀하셨습니다. 

“유 시인, 난 다음 시집 제목을 마흔두 개의 초록이라 하기로 결심했어요. 얼마 전 전북 정읍을 가던 길에 나무들로부터 마흔두 개의 초록을 보았거든요.” 

저는 짓궂어져서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정말 마흔두 개였나요?” 

그러자 선생님께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시곤 껄껄 웃으셨지요. 저는 제가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참 좋았습니다. 이제 와서는 후회하는 일이지요.

선생님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 중에 제가 참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다음 시집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그럴 거라고. 매번 시집이 나올 때마다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저는 그 말씀이 싫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런 말씀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이제는 설핏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먼 나라에서 이곳에 마음을 두고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의 어려움을 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새벽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슬 같은 시를 붙잡아두기 위해 그 참혹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밤을 밝히는 선생님의 고충을 어찌 헤아린다고 적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선생님의 시집은 한 권 한 권 치열한 싸움의 기록입니다. 그것은 매번 마지막을 염두에 둔 간절함입니다. 원치 않게 미국으로 가시게 된 이후로,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선생님께선 여전히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계시는 거지요. 가끔 한국어로 초록색을 마흔두 번 차근차근 세었을 선생님을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는, 시인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실 때의 기쁨을 짐작해 봅니다. 제가 보지 못한 그 순간 반짝이던 선생님의 눈빛을 상상해 봅니다. 아찔합니다. 저는 어쩜 그리 어둡고 무례했던 것일까요.



여전히 선생님은 시를 쓰고 계십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년 전 펴내신 『천사의 탄식』(문학과지성사, 2020) 뒤표지에는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싶어서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라고 적으셨지요. 어쩌면 지금도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보고 듣고 계신 중이겠지요. 이번이 마지막 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그리고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마지막은 매번 갱신되는 중입니다. 선생님의 그 두툼하고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한 손으로부터.

그리고 선생님. 이곳은 신록의 계절을 지나 한창 우거져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께서 어린 시절을, 학창 시절을, 문학청년의 시기를 보낸 서울 혜화동에서, 가지치기 끝에 조그마한 잎들을 매달고 있는 플라타너스 근처에서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선생님의 새로운 마지막 시집을 읽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 그다음을 기대하면서요.

어서 이곳으로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꾸지람을 받고 버티며 가꾸어놓은 이 서점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을 가득 담아.


- 혜화에서 유희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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