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㊼] 워싱턴까지 불탄 미국-영국 전쟁은 왜 일어났나

[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㊼] 워싱턴까지 불탄 미국-영국 전쟁은 왜 일어났나

데일리안 2021-09-21 14:01:00 신고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는 러시모어 국립 기념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4명의 미국 대통령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토머스 제퍼슨, 노예해방에 기여한 에이브러햄 링컨, 마지막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이들은 지금도 미국인이 존경하는 대표적인 대통령들이다.


Paul M. Rapin de Thoyras - This illustration is from the 1816 book,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Earliest Periods, Volume 1ⓒU.S. Library of Congress.Paul M. Rapin de Thoyras - This illustration is from the 1816 book,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Earliest Periods, Volume 1ⓒU.S. Library of Congress.

그런데 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적인 인식이 있었다. 바로 영국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의 영토가 침략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온 공포였다. 이러한 두려움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812년 미영전쟁 경험이었다.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저서 ‘1812년 해군전쟁’(원제: The Naval War of 1812)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책에서 1812년 일어난 전쟁을 미국과 영국의 정치․사회적 풍토 속에서 검토했다. 그리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루스벨트는 해전을 중심으로 양측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당시 이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루스벨트의 경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루스벨트는 이후 해군 차관보를 역임했고,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이른바 ‘백색함대’라는 이름의 함대를 파견해 전 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미국사에서 1812년 전쟁은 제2의 독립전쟁으로 일컬어진다. ‘1812년 해군전쟁’을 저술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시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상 결과론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라는 점(나폴레옹 전쟁)을 노리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때 미국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812년 6월 1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은 의회에서 영국에 대한 미국의 개전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매디슨 대통령의 연설 이후 하원에서 대영 전쟁 선포를 찬성했고, 곧이어 상원에서도 이를 찬성하면서 전쟁이 결정됐다. 6월 18일, 매디슨 대통령이 대영 전쟁 선포에 대해 서명하면서 미국은 공식적으로 영국과 전쟁에 돌입했다.


개전 직후 미군은 캐나다를 침공했다. 미군은 디트로이트강을 건너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도착한 직후 항복을 명령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군의 캐나다 점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은 우선 지역 인디언과 민병대를 통해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미군은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캐나다에 남아 있는 미군 역시 원주민에게 학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직면하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군은 2차 침공을 준비했다. 10월 미군은 캐나다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4개 방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미군의 공격은 영국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심지어 디트로이트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미군은 영국군에 항복했고, 초기 주요 전투였던 퀸스턴 하이츠 전투에서는 1000여 명에 가까운 포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군의 캐나다 침공이 좌절되자 이제는 영국군이 오히려 미국 영토에 침공했다.


1814년 8월 24일, 영국군은 블라덴스버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워싱턴을 점령한 뒤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이 과정에서 당시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던 국회의사당과 백악관까지 불타버렸다. 이처럼 영국군의 워싱턴 공격은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일부 회고록에서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흔히 랜스다운 초상화라고 불리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백악관에서 옮기기 위해 액자에서 그림만 잘라서 가져갔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제임스 매디슨도 겨우 영국군을 피해 워싱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미군은 대통령이 영국군에게 붙잡히리라 예측했다. 그 정도로 미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이다. 영국군이 워싱턴을 불태웠을 때 갑자기 비바람이 불더니 화재를 진압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강풍이 워싱턴에 있던 대포를 날려서 영국군이 있는 곳에 떨어뜨려 많은 영국군이 죽었고, 결국 영국군은 워싱턴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서 이 폭풍은 일명 ‘워싱턴을 구한 폭풍’이라고 불린다.


당시 미국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미국의 전쟁 준비 부족을 든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시 저서에서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리한 미국의 전쟁 시도였다. 이후 미 의회는 해군 증강에 많은 예산을 배정했고, 이를 뒷받침할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이는 전쟁 당시 활약했던 앤드루 잭슨과 윌리엄 헨리 해리슨 등이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여담으로 해리슨 대통령은 취임식 당시 비를 맞으며 연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에 걸렸는데, 이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면서 취임 31일 만에 사망했다.


ⓒ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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