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나도 성인여성 #ADHD 일까?

설마 나도 성인여성 #ADHD 일까?

엘르 2021-09-20 00:00:01 신고



정상, 저하, 경계, 저하, 저하…. 컴퓨터 화면에 빨갛고 파란 글씨들이 떴다. 체감적으로 한 시간은 걸린 듯 지루했던 테스트 내내 쏟아지던 잠이 번쩍 깨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30분 남짓 걸린 ‘종합 주의력 검사(Comprehensive Attention Test)’(이하 CAT) 결과지가 나를 판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순선택주의력검사(시각)에서 저하, 단순선택주의력검사(청각)에서 반응 시간 저하, 억제지속주의력검사에서 저하, 간섭선택주의력검사에서 저하, 분할주의력검사에서 저하, 작업기억력검사에서 정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습과 일상생활에서 주의력 부족이 의심된다면 ADHD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ADHD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단히 놀랍지는 않았다. 노트북과 나밖에 없던 컴컴한 방에서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계속 뜯고, 모니터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사진 찍느라 제때 반응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와! 나 지금 진짜 ADHD 같네…’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또 깜빡했어. ADHD인가 봐” “왜 이렇게 다리를 떨어? ADHD같이” 같은 표현이 흔한 비유처럼 쓰일 정도로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ty Disorder;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는 현대인에게 꽤 익숙한 질병이다. ADHD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전 연이어 나온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26세에 ADHD 진단을 받은 1992년생 정지음 작가의 〈젊은 ADHD의 슬픔〉 그리고 신지수 임상심리학자의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다. ADHD라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어린 남자아이가 자연스럽게 연상됐기에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두 성인 여성이 ADHD 환자임을 고백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먼저 펼친 것은 〈젊은 ADHD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단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내 삶이 마치 성냥개비로 만든 장난감 집처럼 위태롭다는 걸 알지만 에너지 또한 넘쳐나서 어떻게든 혼돈 속을 헤쳐나갔던, 타인이 보기에 ‘쟤는 참 재미있게 사네’라고 여겨졌던 20대의 내가 오버랩되는 장면들. 지금까지 계속되는 문제점, 예를 들어 충동적인 금전 감각, 관심사에 한정한 과몰입, 타인의 신체에서 나는 불쾌한 소리에서 느끼는 공포에 가까운 환멸, 속독하는 탓에 다독가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 조직화 능력은 떨어지는 것, 단 한 번(정말 10년 넘는 자취생활 동안 단 한 번도!)도 공과금을 제때 납부한 적 없는 것 같은 묘사는 완전히 내 이야기였다. 정지음 작가는 ADHD 유형 중에서도 주의력 결핍 우세형에 속한다. 대체로 주의력이 결핍돼 있지만 경우에 따라 직관력과 추진력이 뛰어나 보일 수 있는 유형이다(물론 그는 ADHD에 장점이 있느냐는 질문은 똥에서 향기가 나느냐고 묻는 거라고 했지만).

이렇게 나는 70%의 호기심과 30%의 의심을 안고 서울센트럴정신건강의원과 한 건물에 자리한 ‘서울라운지’를 찾았다. “사실 성인 ADHD라는 단어에는 어폐가 있어요. ADHD는 살다가 걸리는 것이 아니라 전두엽에 문제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만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ADHD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어린아이에게 해당되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형종 선생님의 말이다. 어린 시절 치료 시기를 놓친 이들이 성인이 돼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 찾아왔다가 본인이 ADHD임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실제로 어린 시절 ADHD 진단을 받은 이들의 85%가 성인이 돼서도 같은 증상을 앓는다.
서울라운지의 ADHD 검사 과정에서 당일 진단이 가능한 ‘단축 종합 ADHD 검사’ 구성은 다음과 같다. 자가 보고 성격의 ‘버클리 집행기능결핍척도 검사(이하 버클리)’, 컴퓨터 검사인 ‘CAT’, 필터링 질문을 곁들인 면담, 전두엽 이상을 확인하는 정량 뇌파 검사까지. 기록이 남지 않는 비급여로 이 모든 과정을 진행했을 때 드는 비용은 20만 원대 중후반 정도다. “ADHD는 과잉 진단되기 쉬운 만큼 정밀한 상담과 검사가 필요합니다.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ADHD인 경우도 있죠. 늘 문제아 취급받고 자책하는 상황을 반복하다 보면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특히 주의력 문제는 성인이 됐을 때 더 심각해진다. 역할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지도나 도움을 받을 기회는 점점 줄어들기 때문.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못해 타인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한편 과잉 반응 성향을 보이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과속 운전, 도박 같은 자극, 외도 등에 쉽게 노출된다. 모두 결혼생활을 비롯해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치명적인 행동들이다. 미숙한 업무 능력, 참을성 부족으로 회사를 떠나거나 고통의 이유를 모른 채 방치된 사람들이 ADHD 진단과 치료를 받으며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전체 인구 5~8%로 추정되는 성인 ADHD의 가시화가 꾸준히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정신건강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단 결과는 내 현재 상태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요소일 뿐, 그것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신지수 임상심리학자는 이 논의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동안 환자들에게 ADHD 소견을 내리기도 했던 자신이 왜 서른 살이 되도록 스스로 ADHD 가능성을 의심하지 못했는지, 가장 큰 이유로 ‘여자아이와 여성 ADHD에 대한 사회 편견’이 분명히 작용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30년 넘게 ADHD를 다뤄온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앨런 리트먼 박사는 “ADHD가 있는 여아는 최대 4분의 3이 진단받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임상연구가 심한 과잉행동을 하는 백인 남아만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생긴 데이터 공백 때문”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남성의 ADHD 증상이 과잉행동(과잉행동 우세형)을 내보이는 것과 달리 여성의 증상은 부주의하고 구조화를 어려워하는 양상(주의력 결핍 우세형)으로 발현된다. 심리학자 케슬린 나도와 소아 전문의 퍼트리샤 역시 “여성들은 어린 나이부터 타인에게 친절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길들이기를 통해 여성은 결과적으로 손을 꼼지락거리거나 과장된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집에서 폭식하거나 충동구매, 수다를 떠는 것으로 증상을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진단 기준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의 항목 자체가 젠더 편향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적 언어 표현을 사용할 뿐 아니라 연극성과 히스테리성 성격 장애를 진단할 때 여성의 특성을 과하게 병리화했다는 것. 실제로 ‘집단’으로서 남성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여성을 우울 장애가 있는 것으로 더 쉽게 평가를 내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ADHD 환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일까? 일단 진단을 받고 나면 약물 치료가 동반된다. 기본적으로 뇌파(베타파)의 불균형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다. 대표적 ADHD 처방약으로 알려진 ‘콘서타’도 75%의 사람에게만 효과를 보인다. 박찬민 원장은 “모든 정신 약물은 자신에게 맞는 복용량을 찾아가는 과정을 필수로 동반합니다. 처방 시 완전히 자기 안의 새로운 스위치가 켜졌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효과를 느끼는 환자도 있지만 그런 느낌은 사실 오래 지속되지 못해요. ADHD는 완치 개념이 없기에 집중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보조장치 개념으로 약 복용을 권장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효과가 있더라도 부작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재고해 봐야겠죠.” 사람들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진단 결과는 내 현재 상태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요소일 뿐, 그것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상’과 ‘기능 저하’ 개수가 엇비슷한 내 CAT 검사 결과지를 받아 든 이형종 선생님이 내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오늘 컨디션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며칠째 이어진 수면 부족에 여러 업무로 초조한 상태라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나 큰일이 있었는지 묻기도 했다. 자가 보고로 진행한 버클리 검사에서 시간 관리나 정서 조절, 조직화 면에서 안정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또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했던 걸까? 컴퓨터는 내가 이상하다는데! “선생님, 그런데 저는 업무 외에 개인 시간 관리는 엉망인데요. 지금도 회사 책상 아래 2주째 못 맡긴 세탁물이 있거든요. 여행 캐리어는 한 달 넘게 정리하지 않았고요.” 약간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말하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중요도가 다르잖아요. 보통 이런 질문을 업무와 사생활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하는 분은 없는데 생각이 깊은 것 같은데요?” 면담을 마친 이후 뇌파 검사를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현재 내게 실재하는 불편은 크지 않으며, 내 방식대로 삶을 잘 통제하고 있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ADHD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권유되는 실천 사항은 이미 내 라이프스타일과 일치하는 항목이 많았다. 단시간 근력운동을 한다, 타이머를 활용해 집중도를 높인다, 작은 정리정돈 목표를 가진다, 효율을 상승시키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전자 도구를 활용해 메모한다 등. 무엇보다 10~20대의 나였다면 문진표에 어떻게 답했을지 상상하는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사회화의 옷을 입기 위해 고군분투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버스나 기차를 놓치지 않고, 신분증과 카드를 수시로 재발급하지 않으며, 아파트 관리비는 적어도 제때 내니까. 이토록 노력해온 스스로를 슬쩍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달까? 정지음 작가도 말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는 ADHD가 아닌, 모든 인류를 정상인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단지 ADHD가 아닐 뿐 다들 제각기 미쳐 있는 세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도움말 l 서울라운지, 서울센트럴정신건강의학과
참고 서적 l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실수투성이 당신, 성인 ADHD?〉 〈젊은 ADHD의 슬픔〉


에디터 이마루 사진 MARK PILLAI 디자인 민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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