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물건 #볼캡

요주의 물건 #볼캡

엘르 2021-02-23 18:00:00 신고



볼 캡의 신분 상승



해가 중천을 가리킬 때까지 늦잠을 즐기고 침대 위를 뒹굴다 극한의 허기와 마주한 주말 오후, 미처 감지 못한 머리를 급히 가리려 손에 집히는 캡 모자를 눌러쓰고 편의점을 향한다. 갑자기 집 앞에 찾아온 친구들의 부름에 황급히 달려나갈 때도 역시 ‘대충 아무거나’ 모자를 골라 ‘대충 눌러쓰고’ 거리를 나선다. 돌이켜보면 볼 캡은 내게 대략 이런 존재였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을 황급히 가려줄 보호막. 종종 염세주의가 극에 달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볼 캡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넘쳐나는 거리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차단하고 오롯이 나를 지켜줄 든든한 방패이자 안식처 같은 역할. 그동안 많은 패션 디자이너와 인사이더가 이 모자의 심미성과 효용성을 강조했음에도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 내게 야구 모자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마치 서랍 속 수많은 양말처럼 ‘굳이’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관심을 쏟기엔 왠지 망설여지는 아이템이랄까. 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은 대체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법처럼 찾아오는 법. 그동안의 고루한 편견을 뒤로한 채 최근 볼 캡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떡상’하다가 급기야 상한가를 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2021 S/S 시즌 셀린 컬렉션의 영향이 컸다. 셀린의 수장 에디 슬리먼은 알다시피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새롭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평범한 아이템에 매혹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데 일가견 있는 인물이다.

매 시즌 반복적으로 선보이는 블레이저와 가죽 재킷, 무색무취의 화이트 티셔츠나 데님 팬츠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당장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모습으로 환골탈태하니까. 모나코의 스타드 루이 경기장을 배경으로 펼쳐진 셀린의 새로운 컬렉션 역시 대범하고 극적인(!) 런웨이와는 다소 대비되는 영 캐주얼 룩으로 채워졌고, 거의 모든 모델이 베이스볼 캡을 푹 눌러쓴 채 경기장을 누비며 자유분방한 매력을 뽐냈다. 쇼가 공개된 직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 모자’에 관해 눈을 반짝이며 입을 모았다. 베이스볼 캡이 이토록 갖고 싶어진 건 난생처음이라거나, 매장에 솔드아웃되기 전에 서둘러야겠다는 등 분분한 의견이 오가는 사이 올봄 캡 모자의 몸값이 어느 때보다 수직 상승할 거란 전망이 이어졌다. 모두의 옷장에 하나씩 있을 법한 블레이저와 가죽 재킷, 빈티지 드레스, 데님 팬츠 등 간편한 룩과 환상적으로 짝을 이룬 스타일링을 보고 있자니 나도 ‘그 모자’만 있다면 카이아 거버처럼 근사한 룩을 완성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부풀기도 했으니!


한편 리얼 웨이에서는 남다른 스타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셀러브리티들의 볼 캡 사랑이 돋보여 눈길을 끈다. 유려하게 재단된 보테가 베네타의 신상 코트에 검정 야구 모자를 눌러써 ‘꾸안꾸’ 스타일을 완성한 헤일리 비버, 셀린 런웨이에서 금방이라도 걸어 나온 듯한 옷차림에 클래식한 NY 로고 캡을 즐겨 쓰는 카이아 거버,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매니시 수트와 캡 모자를 감각적으로 매치한 벨라 하디드…. 어제 찍은 사진이라 해도 믿을 만큼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회자되는 다이애나 빈의 파파라치 컷에도 베이스볼 캡이 심심찮게 등장하니 이쯤 되면 그동안 이 모자의 가치를 소홀히 여겼던 지난날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 마침 매일같이 볼 캡을 즐겨 쓰는 스타일리스트 친구의 유별난 모자 사랑이 떠올랐다. 신발보다 모자를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는 그녀는 틈만 나면 볼 캡 쇼핑에 나서는데, 명품 브랜드 로고보다 생경한 글자가 장식된 모자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요즘엔 많은 업체에서 캡 모자를 ‘굿즈’ 개념으로 만들어 판매하더라고. 그중 영국 출판사 ‘이이디어(Idea)’에서 선보이는 모자는 꼭 구입하는 편이야. 담백한 디자인이라 어디에나 잘 어울려서 제일 좋아하는 아이템이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이이디어를 비롯한 출판사는 물론 독립영화사 ‘엘라라(Elara)’에서 선보인 베이스볼 캡은 티모시 샬라메와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등의 셀러브리티들이 즐기면서 뜻밖의 유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볼 캡은 더 이상 한정된 T.P.O를 위한 패션 아이템이 아닌 그 이상의 가능성을 지닌 ‘요주의 물건’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컨대 이 매력적인 아이템을 더욱 자유로운 방식으로 즐기는 이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에디터 역시 평소 아끼는 마르지엘라의 블레이저, 아크네 가죽 재킷과 데님 팬츠에 경쾌한 화이트 볼 캡을 매치할 계획에 벌써부터 들떠 있으니까. 뉴 노멀 트렌드에 힘입어 일상적이고 편안하지만 그 자체로 임팩트를 지닌 패션이 각광받는 시대, 이런 흐름에 탑승한 볼 캡이 바로 그 상징적인 존재다.


에디터 김미강 사진 GETTYIMAGESKOREA/ IMAXtree.com 웹디자이너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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