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갤러리현대는 50주년을 맞아 구상화가 최민화를 초대했나?

왜 갤러리현대는 50주년을 맞아 구상화가 최민화를 초대했나?

에스콰이어 2020-10-18 18:00:00 신고



구상화가 최민화입니다


작년 가을 후암동 언덕 동네에 있는 최민화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그가 나를 맞으며 건넨 첫 인사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안녕하세요. 구상화가 최민화입니다.” ‘구상화가’라는 단어가 짱돌처럼 귀에 콕 박혀버렸다. 잊힌 단어가 주는 이 묘한 울림이라니. 평생을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아온 사람이라야 이런 간결한 외연으로 자신을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의 구상은 또 사람이기도 하다. 최민화의 작품엔 늘 사람이 있다. 인물화나 역사화라는 장르를 통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1970년대 중반 화단에 데뷔해 한국 구상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의 본명은 최철환이다. 그러나 1982년부터는 최민화를 작가명으로 쓰고 있다. ‘민중은 꽃’이라는 의미다.

아무도 없는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된 스튜디오 2층의 불을 처음 켰을 때가 생각난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동굴 속 벽화에 횃불을 들이대는 경험이었다. 최민화는 분홍빛이 감도는 화면에 그려진 군상의 모습으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한 〈분홍〉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1990년대 말부터 한반도의 고대 시공간을 캔버스로 소환하는 새로운 연작의 제작에 착수했다. 고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유라시아 대륙 40여 곳에 배낭여행도 떠났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구상화가 최민화가 기획하고 하나둘 그려가며 완성한 역작 〈Once Upon a Time〉을 실견한 순간이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감탄보다는 ‘이게 다 뭔가’ 싶은 놀라움에 가까웠다. 동서양 미술사의 도상들이 한 화면에 이물감 없이 공존하는 그의 작업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무척 낯설었기 때문이다.

갤러리현대가 최민화의 개인전을 개최한 배경에는 구상회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들여다보는 동시대 아트 신의 최신 흐름이 깔려 있다. 구상회화의 미술사적 흐름을 조망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미술 본연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전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근래의 사례로 2018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기획전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를 꼽을 수 있다. 김성원, 김승덕, 프랑크 고트로가 공동 기획해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제작한 전 세계 25개국 50여 명의 구상회화를 한자리에 모은 기념비적 전시였다. 역사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온 구상회화의 힘과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대담한 기획이 돋보였다. 제이콥 카세이, 루시앙 스미스로 대표되는 ‘좀비-형식주의’는 그 용어가 탄생한 2014년을 전후해 미술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올라 모던한 저택의 한쪽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좀비-형식주의의 다음 주자로 구상회화를 주목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미술사의 다양한 양식과 인물 형상을 기괴한 모습으로 조합한 일련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좀비-형상주의’라 호명하기도 한다. 미술사적 해석뿐 아니라 일반 관람객의 관심도 구상회화에 집중되는 추세다. 생각해보면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의 단골 주인공은 늘 구상화가였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의 개인전에는 3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해 겨울부터 2020년 봄까지 갤러리현대는 개관 5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 근현대 인물화를 재조명하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 – 한국 근현대인물화〉전을 선보였다. 다양한 인간상을 담아낸 역사의 ‘자화상’인 인물화를 선별해 100여 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 미술의 성장과 발자취를 살피고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 전시였다. 출품작에는 한국인의 어제와 오늘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2017년 이인성미술상을 받으며 대구미술관에서 기념전을 개최한 최민화는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전에 민주화 투쟁의 뜨거운 현장을 담은 연작 일부를,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 – 한국 근현대인물화〉전에는 분홍빛 안개가 낀 배경으로 한 남자가 무언가를 먹는 〈식사〉를 출품했다.

최민화의 〈Once Upon a Time〉 연작은 구상회화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풍성한 이미지의 향연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와 풍속화, 도속화와 탱화 등 한국 미술을 비롯해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르네상스 회화, 힌두와 무슬림의 종교 미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단군 신화의 웅녀와 호녀, 부여와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해모수,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주몽, ‘서동요’의 선화 공주와 서동, ‘공무도하가’의 백수 광부와 그의 처 등 수업 시간에 한 번쯤 들어본 머나먼 세계의 신화적 인물들이 위풍당당하게 캔버스에 등장한다. 놀란 눈으로 작품 앞을 서성이는 내게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미적 쾌감을 주거나, 그리려는 그림의 소재와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차용했어요. 고대라는 세계가 그러했던 것처럼요. 고대에 관한 서적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대 인간이 추구하는 물질적 욕망을 다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상상력이 가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하나하나의 상징적 언어에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이번 연작의 핵심입니다.” 그의 짧은 설명은 ‘구상회화의 매력은 이것’이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즉 본 적이 없는 어떤 세계를 우리에게 손에 잡힐 듯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일 말이다.

최민화가 〈Once Upon a Time〉을 만드는 과정은 영화감독의 일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한국 고대사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화면 구성과 배치, 인물의 표정과 몸짓, 그들이 입은 의상과 배경 처리 등을 무수한 버전으로 변주하며 도상학적 실험을 이어갔다. “구상회화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얼굴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귀와 측두와입니다. 인체에서는 손과 발의 위치죠. 그림의 주제와 성격을 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피카소가 그린 좌상을 잘 살펴보세요. 인물만 잘 그렸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인물을 둘러싼 배경은 늘 어려운 문제죠. 주인공의 성격과 일치되어야 하니까요. 가장 센 배경은 단색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렇게 즐겨 처리하죠. 에드워드 호퍼는 마치 범신론자처럼 배경과 인물을 똑같이 그려요.” 자신의 작품과 여러 거장의 이야기가 술술 이어졌다. 그에게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듣다 보니 〈Once Upon a Time〉 연작은 하나의 거대한 연애편지가 아닐까 싶었다. 구상회화, 나아가 미술사를 향한 최민화의 애정 고백 말이다. 그는 미술의 전통과 역사가 구상회화에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 “추상회화가 등장해서 만들어진 단어가 구상회화잖아요.” 최민화의 섬세한 붓질을 통해 한반도의 고대 시공간과 주인공들이 동시대를 사는 우리와 함께 호흡하게 됐다.

WHO'S THE WRITER?
김재석은 〈아트인컬처〉 편집장을 지냈으며 갤러리현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EDITOR 박세회 WRITER 김재석 Illustrator 노준구 DIGITAL DESIGNER 이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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