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시간, 풍경과 술, 동굴을 빚다

울진의 시간, 풍경과 술, 동굴을 빚다

더트래블러 2020-02-14 16:37:37 신고

냉랭한 도시에 살다 보면 넓은 바다의 품이 그리 워질 때가 있다. 잠시 소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를 찾고 싶을 때 언제든 달려갈 바다가 있는 곳, 울진을 향해 집을 나섰다. 이 겨울 들어 가장 따뜻한 날, 이른 아침부터 편한 옷을 챙겨 입고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서 울진까지는 고속버스로 4시간. 전국적으로 조금 흐리다는 날씨 앱의 알림과 동시에 울진행 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가는 길

울진 관내 버스터미널은 모두 6곳. 목적지에 따라 정류장을 미리 체크하자. 

국내의 수많은 바다 중에도 나는 왜 울진에 가고 싶었을까. 어느 여행 팸플릿에서 소개하길, 울진은 국내에서 물이 가장 맑은 바다가 있는 곳이라 했다. 또 너른 바다를 수호하듯 높이 솟은 산들이 있다.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그 봉우리들 덕분에 경치가 빼어난 것은 물론이다. 울진의 겨울은 내륙보다 훨씬 온난한 편이다. 이날 역시 기온은 영상 10도를 훌쩍 넘겼다. 처음 만날 그곳의 풍경을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기대가 차오른다. 멀미를 대비해 간단히 채운 속이 출출해질 무렵 버스도 울진에 들어섰다.

울진의 시간, 풍경과 술, 동굴을 빚다

여행이 시작이 될 첫 바다는 망양정해수욕장으로 정했다. ‘바랄 망望을 써서 망양望洋, 말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기 위한 곳이니 안성맞춤이었다. 조용한 해변에 수평선을 마주하고 서자 끝없는 바다가 시야를 꽉 채운다. 해변 옆 언덕 위로 올라가면 망양정이 있다. 조선시대 숙종이 관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의미의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현판을 내린 곳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이 정자는 오랜 세월에 여러 차례 허물어져 곳곳으로 옮겨지다 여기에 이르렀다.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이 너른 바다에 마음을 내려놓으려 동쪽으로 향했던 듯하다. 시간은 흘렀지만, 절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백사장에서 이런저런 잡념을 굴리고 있노라니 이대로 얼마쯤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잊었던 허기가 몰려와 모래를 털고 일어섰다.

이럴 때 마침 맛도, 평도 좋은 식당을 만나게 되는 것은 여행자에겐 굉장히 안도할 일이다. 해변 바로 앞 ‘망양정횟집’에서 해물칼국수를 주문했다. 가리비와 홍합, 바지락… 금방 어망에서 쏟아 부은 듯 바다를 담은 칼국수가 나왔다. 달그락거리며 조갯살을 발라내고 뜨끈한 국물, 면발과 함께 후루룩 넘기자 해산물의 풍미가 진하게 느껴진다. 좀 전까지 꼬리를 물던 생각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오직 “맛있다”를 연발하며 그릇을 비웠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 이 지역에서 유명한 막걸리 양조장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잠시 들 르기로 했다. 최근 들어 많은 양조장이 술을 생 산하는 곳을 넘어 체험 가능한 문화공간으로 거 듭나고 있다. 이곳울진술도가 100년 전통 의 막걸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술맛이 뛰어난 것은 물론 3대째 맥을 이어왔다는 점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양조장을 함께 운영하는 2, 3대 대표 홍순영, 홍시표씨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흔쾌히 문을 열어 맞아주었다. 시설 노후화로 인해 얼마 전 새로 지었다는 양조장 건물은 오랜 전통을 상징하듯 중후한 멋을 지녔고, 술 빚는 공간답게 구석구석 위생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1920년대부터 울진 유일의 막걸리를 생산해온 양조장으로 주변 지역에서만 연간 40만 병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하얀 누룩이 거품을 퐁퐁 터뜨리며 익어가는 2층 막걸리 발효실에 들어서자 맡기만 해도 취기가 오를 듯 농밀한 향기가 밀려든다. 어서 맛보라고 부추기는 그 향에 못 이긴 척 한 잔을 받아들었다.

이곳 막걸리의 특징은 청량감과 은은한 단맛으로, 뒷맛이 깔끔해 탁주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즐겨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라운 점은 울진의 원료로 빚은 100년 전통의 막걸리 한 병을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17년부터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돼 사전에 5명 이상 예약을 하면 직접 술을 빚고 시음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막걸리 두 병에 묵직해진 가방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서는데, 배웅하던 대표가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조만간 서울에도 울진술도가의 막걸리를 유통할 예정이란다. 

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울진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인 ‘성류굴’에 도착했다. 선유산 아래 컴컴한 입구와 달리 온기로 가득한 동굴에 들어서니 해설사가 말했다. “좀 더우시죠? 이곳은 연중 15~17도로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합니다.”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성류굴의 형성 시기 는 약 2억 5000만년 전으로 본다. 긴 세월, 이 석회동굴은 870미터의 공간에 독특한 모형의 석화, 석순, 종유석을 만들었다. 얼마나 오래전인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으로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본다. 관람객에게는 일부 구간인 270미터만 개방되며, 그 안에는 10개의 광장과 호수, 오작교, 미륵 동상, 사랑의 종, 로마 궁전 등 독특한 생성물이 가득하다. 특히 호수에 잠긴 대형 종유석과 석순은 성류굴의 신비가 절정에 이르는 구간이다. 처음엔 얼핏 기묘한 듯 보이지만, 점점 시간이 빚어낸 경이로운 풍경에 감탄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금강산에 빗대어 ‘지하금강’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굴신을 위한 제를 올렸다고 하는데, 2019년 동굴 벽에서 신라시대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내용의 새로운 암각문이 발견되며 사료 연구도 계속 되고 있다. 역사와 상상을 오가며 지루할 틈 없는 동굴 탐험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해질녘 추위가 몰려왔다. 

울진의 바다와 사람은 닮아간다

내내 한적한 곳에만 있다 보니 새삼 항구의 북적임이 반갑게 느껴진다. 새벽마다 고깃배가 정박하는 부두, 후포항 어시장과 대게 거리는 울진의 어느 곳보다 활기가 가득한 곳이다. 시장 상인들이 긴 다리를 꿈쩍이는 대게를 자랑스레 쌓아놓고 손 님을 맞이하고 있다. 갓 잡은 오징어, 꽁치, 도루 묵이나 말린 가자미도 빛깔부터가 다르다. “안 사도 되니까 일단 보고 가이소.” 수완 좋은 한마디에 사람들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고, 구수한 경상도 말씨가 흥정 구경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최상품 대게는 물론 다리 하나 떨어진 비품을 ‘득템’하는 기회도 이런 어시장만이 주는 쏠쏠한 재미다. 저마다 박스 하나씩을 손에 든 사람들의 표정이 이를 증명해준다.

경쾌한 분위기의 후포항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길, 다시 버스에서 짧은 여행을 곱씹어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 앞에 혼자가 되기 위해 떠난 이 여행에서 새로운 것을 참 많이 만났다. 어느 하나 바다 아닌 곳이 없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울진의 얼굴이 있었다. 하염없이 바라 보고 싶은 바다, 그 곁을 지키며 살아온 울진 사람들, 이 둘의 닮은 점은 속을 훤히 열어 보이는 투명함이었다. 물 맑은 겨울 바다가 따뜻하게 가슴속에서 출렁였다.

에디터 황은비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경북도청 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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