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대통령의 해외 연설 중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을 꼽으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베이징 대학 연설이 떠오른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에 비유하고 한국은 '작은 나라'로 표현했던 그 유명한 연설이다. 아무리 자신은 낮추고 상대는 높이는 게 동양적 겸손의 가치라고 해도 국가 간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런 연설문을 준비했던 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 조치였던 중국의 한한령은 국내 경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던 청와대 옆 삼청동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고 주변 상가에서는 임대 매물이 쏟아졌다. 한중관계가 곧 정상화되리라 믿으며 버텼던 상인들도 하나둘씩 가게를 접었다. 국익을 위해, 소상공인들을 위해 굴욕을 알면서도 감내하며 준비했던 연설문이라 믿는다.
해당 연설이 유독 기억 속에 강렬히 각인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한국 기자에 대한 폭행 사건이 발생한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밀고 밀치는 몸싸움 수준이 아닌 수십 명에 둘러싸여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발길질을 당한 집단폭행 사건이었다. 더구나 한국 대통령의 행사가 있었던 현장에서, 그것도 중국 측 경호원들에 의해 자행됐다.
이후 취해진 조치는 실망스러웠다. 시진핑 주석은커녕 책임 있는 중국 당국자의 공개 사죄는 없었고, 제대로된 진상 규명 조치도 없었다. 공안이 아닌 사설 경호업체 직원이 한 것이라는 전언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국민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국가가 안전을 지켜줘야 한다"던 문재인 대통령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요 한국은 작은 나라'라는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느꼈던 씁쓸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동쪽의 소국 대한민국쯤은 얼마든지 밟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터다.
민주당 지지층의 반응은 더욱 비상식적이었다. 소위 말하는 민주당 스피커들 사이에서 기자들의 취재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언급이 나오고, 여기에 호응해 강성 지지층은 "기레기들이 맞을 짓 했네"라며 매도했다.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2차 가해와 이들의 행태가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외교를 '굴욕적'이라고 비판하며 장외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대위변제 방안에 대해서는 '제2의 을사늑약'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비유까지 쓰고 있다. 26일 안중근 의사 113주기에 맞춰서 이 대표는 "굴종 외교로는 우리 국민을 지켜낼 수 없다"고도 했다. 한중관계 개선이라는 '대의' 속에 폭행 사건을 유야무야 넘겼던 민주당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를 완전히 방치한 것도 아니다. 만족스럽진 않으나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이라는 간접적인 사죄도 받아 냈다. 국제사회 역시 한일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일본 측의 진전된 입장을 촉구하고 있다. 성패는 기시다 총리의 답방을 본 뒤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야당의 위치에서 '굴욕적'이라는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매주 장외투쟁을 이어가며 정권 퇴진을 외치는 지금의 민주당의 모습은 한일관계가 파탄 나기만을 바라는 정치세력으로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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