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진승 기자] "조선시대 민족성의 아름다움은 당분간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사카와 타쿠미가 1922년~23년 무렵에 쓴 14권의 일기는 현재 그의 고향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지정 문화재로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일기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사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그는 한반도에 평화가 오길 간절히 바랐다. 1922년 총독부가 광화문을 강제 철거하고 조선신궁을 세우려 할 때 강하게 반대해 친한인사로 몰려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비통함도 함께 적혀 있다.
일본 현지에서 한일 교류를 이야기할 때 아사카와 노리타카(Noritaka)와 타쿠미(Takumi) 형제는 한일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효시로 기억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자기와 공예품을 시작으로 일본 현지에 '민예' 붐을 일으킨 주역으로 평가된다. 가히 조선 한류의 시작을 열었다고 할 만하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형제의 노력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으로 꽃을 피웠다. 1924년 경복궁 일각에 개관한 조선민족미술관은 3년여간 동인으로부터 받은 기부금과 자신들의 월급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측에 인도된 미술관 소장품과 자료만 3000점이 넘을 정도다. 개관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족미술관' 명칭 가운데 '민족' 단어를 삭제하라고 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들은 일찍부터 조선어를 습득하고, 한복을 입고, 조선 요리를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함께 일하는 현지 동료의 집에 들어 식사를 하거나 현지 사람과 장기를 두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를 비어 있는 방에 살게 한 적도 있습니다."
조선에 이주한 평범한 일본인이었던 아사카와 형제가 조선에 애착을 갖게 된 데에는 조선백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특히 형 노리타카는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백자 속에서 오랜 세월 쌓여온 조선의 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던 토목 공사로 인해 도편이 출토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수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선 각지의 가마터를 찾아 모은 도편으로 그 산지와 변천을 밝힌 '조선 도자사'를 남겼다. 노리타카가 10년여 간 조사한 한반도의 가마터는 700곳에 이른다. 그는 일본 각지에 전해진 조선 찻잔의 도래 시기를 조사하는 등 조선 도자기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아사카와 형제의 조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들의 남다른 예술적 심상이 빚어낸 결과였다. 일찍이 노리타카는 조선의 생활 속에서 만난 것을 주제로 많은 조각과 그림을 남겼다. 조선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통찰은 자연스레 조선의 예술과 미학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
동생 타쿠미는 도자기 뿐만 아니라 선, 물방울, 등받이 등 조선의 자연과 일상에까지 관심을 이어갔다. 타쿠미의 첫 저작은 '조선의 선'이다. 그는 '조선의 선'에 대해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에 녹아든, 오래 사용할수록 맛이 늘어가는 대표적 공예"라고 파악했다.
타쿠미는 도자기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남겼다. 그는 저서 '조선 도자 명고'에서 도자기 본래의 명칭과 용도를 서술하면서 "작품에 다가가 민족의 생활을 알고, 시대의 기분을 읽는다"고 목적을 밝혔다. 그의 관심은 늘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었다. 그의 조선공예 연구 역시 오랜 세월 조선 각지 사람들과 쌓은 교류의 흔적이었다.
뉴스컬처 최진승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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