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새해 공연계의 공기는 대체로 신작의 무게로 가득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짙은 색을 띠고 다가오는 작품이 있다. 긴 겨울 끝에 마치 새 잎이 트이는 듯 등장한 이름, 뮤지컬 ‘초록’. 차가운 계절에 맞서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이 제목은 이미 많은 관객에게 ‘기대’라는 감정을 먼저 건네고 있다. ‘내겐 나의 초록이 다짐과 용기로 남았다’라는 문구는 작품이 가진 정서적 방향을 미리 들려주는 작은 예고편 같다.
북극성은 그동안 음악극 ‘붉은 머리 안’ 등을 통해 신선함과 실험성을 증명해왔다. 이들은 매번 정형화된 상업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서사 구조를 제안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이번 ‘초록’ 역시 이들의 창작적 DNA를 이어가는 결정체로 보인다.
‘초록’은 ‘2025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되며 이미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게다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꾸준히 창작극을 후원해온 ㈜엠비제트컴퍼니가 제작투자사로 합류하면서, 2026년 한국 창작뮤지컬의 시동을 거는 작품으로 위상을 갖추었다.
어떤 작품인지 들여다보면 더 흥미롭다. ‘초록’의 기반은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이다. 한국 근대 단편 중에서도 특유의 비극적 정조가 뚜렷한 작품인데,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겹쳐진다. 그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초록’이라는 색의 상징성이다. 질투, 욕망, 탐미, 파멸. 이 색이 가진 미묘한 기호들은 두 이야기의 정서를 한 점으로 모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간다.
무대의 배경은 1900년대 초 황해 유역, 동굴이다. 이국적인 공간이 아니라 분명 한국의 어느 해안이어야 할 배경이지만, ‘초록’의 세계에서 동굴은 시간과 감정이 겹쳐지는 상징적 공간으로 작동한다. 현재의 토마와 유희가 이곳에서 만나면서 과거의 기억이 층층이 열리고, 초록빛 눈으로 인해 차별받으며 살아온 토마의 여정이 펼쳐진다. 이 도입부는 관객을 한순간에 작품의 정조로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다.
토마가 품게 되는 미래는 유희와의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풍랑 속에서 건져 올린 이방인 류인의 예언이 그 희망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토마의 유일한 빛이자 짐이었던 동생 영진이 돌아오면서 비극의 구조는 조금씩 명확해진다. 이 세계에서 초록은 희망의 색인 동시에 파멸의 예감을 띤다. 이는 작품이 추구하는 정서적 긴장감의 핵심이기도 하다.
배우 구성은 이러한 정서를 무대 위에서 구체화할 힘을 갖추었다. 초록빛 눈으로 태어나 운명을 거스르려는 토마 역에는 박규원, 손유동, 김지철이 캐스팅되었다. 세 배우는 각각 다른 호흡과 에너지를 가진 만큼, 토마라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다채롭게 구현할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이 연기할 ‘초록의 시선’이 같을지, 혹은 서로 다른 해석을 보여줄지 또한 이번 작품의 감상 포인트다.
류인과 영진을 동시에 연기하는 1인 2역에는 이종석, 김찬종, 김재한이 합류했다. 한 배우가 욕망과 순수, 파괴와 희망을 오가는 것은 쉽지 않은 연기 작업이다. 그러나 바로 그 ‘극단 사이의 이동’이 이번 작품의 비극적 구조를 견인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세 배우의 연기적 색채가 서로 다르기에, 세 가지 버전의 ‘류인-영진’은 작품에 다양한 무드와 속도를 만들어줄 것이다.
유희 역을 맡은 박란주, 이한별, 전민지 역시 작품의 정조를 강화한다. 상단주의 딸이라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려는 인물 유희는, 초록빛 세계에서 유일하게 ‘능동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세 배우는 각자의 보이스와 해석을 통해 서로 다른 유희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것이고, 이는 토마의 서사를 흔드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창작진의 조합은 이번 작품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한다. ‘로빈’, ‘그 해 여름’ 등에서 서정적 서사를 섬세하게 직조해온 현지은 작가와, 음악으로 작품의 중심 감정을 정확히 조율해온 박윤솔 작곡가의 만남은 자연스럽고 견고한 결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김태형 연출은 특유의 감각적 장면 구성과 리듬감 있는 무대 언어로 ‘초록’의 색을 시각적으로 확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현정 안무는 감정의 파편을 움직임으로 번역하는 데 강점이 있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과 눌려버린 순간을 모두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안무가의 합류는 작품 전체의 정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작품이 전하려는 감정의 농도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는 안무와 연출의 결합에 달려 있으며, ‘초록’은 그 가능성을 이미 충분히 갖춘 듯 보인다.
제작사 북극성은 이번 작품을 두고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셰익스피어 비극의 결을 담아 이전과는 다른 감상을 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제작사 홍보 문구처럼 들리지 않는다. ‘초록’이 지닌 미학적 기획, 캐스팅, 창작진 조합은 분명 기존 창작뮤지컬의 틀에서 한 걸음 벗어나려는 시도다. 관객이 이 작품을 보며 어떤 색을 기억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초록빛은 쉽게 휘발되지 않을 것이다.
공연은 2026년 1월 27일부터 3월 29일까지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3관에서 만날 수 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초록빛이 어떤 온기로 관객에게 스며들지, 그 감정의 발색을 확인할 시간은 이제 머지않았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