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참가자 중 한국인의 비율은 상위 10~11위에 이를 만큼 높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를 평생의 버킷리스트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랬다. 다만 일상의 관성에 떠밀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그 해상도가 살짝 흐릿해진 꿈이랄까. 젊은 시절 산티아고에 다녀온 인생 선배들의 뜨거운 ‘간증’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열정이 약간 식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국내에도 대안이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가서 ‘사서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고. 각설하고, 산티아고에 직접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산티아고는 ‘실물이 갑’이라는 것을.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으로 알려진 사모스 수도원.
딱딱한 등산화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압도적인 고독이 영혼을 통째로 흔든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어온 나의 내면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요동치고, 잊을 만하면 펼쳐지는 장엄한 풍경 앞에서 경외와 위안, 기쁨과 회한과 기타 등등의 감정이 널뛰듯 오르내린다. 그처럼 마음의 동요와 몸의 고행을 거듭한 끝에 산티아고 대성당과 마주하면 제아무리 냉소적인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 ‘내려놓음’의 희열이야 말로 매년 전 세계에서 20만 명에 가까운 순례자가 산티아고로 모여드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을 사이에 낮게 포복한 투이 대성당.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스페인에 입성한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랜드마크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의 '애착 키 링'인 조가비 장식품.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길은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말하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갈리시아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두 발로 구석구석 감각하는 여정이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갈리시아지만, 습도가 낮고 선선한 가을은 그중에서도 순례자들에게 최적의 보행 시기로 꼽힌다. 약 800km에 이르는 순례길을 온전히 도보로 완주하는 데는 평균 35~40일이 소요된다. 일정상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도보와 버스를 번갈아 이용하며 여러 코스를 ‘찍먹하듯’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순례길이 가진 서로 다른 표정과 매력을 날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몬테 산타 트레가 산 위에 늘어선 옛 켈트족의 석축 움막.
순례자들의 영원한 ‘최애’ 코스, 프랑스 길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라틴어로 ‘별이 빛나는 들판의 성 야고보’를 뜻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이하 산티아고)’는 말 그대로 별이 빛나는 밤에 성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9세기경 스페인 북서부에 자리한 이 땅에 그의 유해를 안치한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세계 3대 성지로 자리 잡았다.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은 큰 코스만 셈해도 어림잡아 열 개가 넘는다. 그중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 Pied-de-Port)에서 출발해 약 800km를 걷는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은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코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 중 절반 이상이 선택하는 인기 코스인 만큼 길이 잘 정비돼 있으며,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도 공립부터 사립까지 폭넓게 운영되고 있다.
순례자 여권 소지 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 숙박비는 하루에 6~10유로선.
첫 번째 주요 지점인 오 세브레이로(O’Cebreiro)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순례길다운’ 클래식한 풍경이 펼쳐진다. 배낭까지 덮는 커다란 우의를 걸치고 스틱을 짚은 순례자들이 안개를 가르며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란! 한국의 초가집을 닮은 밀짚지붕을 머리에 인 전통 가옥 팔로사(Palloza)에서는 벽난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식당들이 늘어선 거리에는 갈리시아 명물인 매콤한 문어 요리 냄새가 짙게 풍긴다. 기념품 가게 입구에는 성 야고보의 유해를 덮은 조개껍데기에서 유래한 가리비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초보 순례자인 나는 본격적인 여정에 앞서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갈리시아 관광청에서 파견된 현지 가이드가 내 배낭 앞주머니에 여권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숙소와 식당, 박물관 등 순례길의 여러 시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요. 순례자를 위한 특별 패스인 셈이죠.” 그의 말대로 순례자 여권은 마법의 할인 티켓인 동시에 순례자의 고된 여정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록장이기도 하다. 알베르게, 레스토랑, 미술관 등 순례길 곳곳에 비치된 스탬프를 그때그때 여권에 찍어둬야 훗날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국에서 공인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세브리오의 풍경.
산티아고로 향하는 표식인 노란 화살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6세기에 지어진 사모스 수도원(Monastery of Samos)이 불현듯 위용을 드러낸다. 중앙 파티오의 네레이드 분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 바로크 양식 건물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를 뽐내는 회랑까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최홍만처럼 웅장해지는 곳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스페인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20세기 중반 저수지 건설로 일부가 수몰됐다가 최근 재건된 포르토마린(Portomarín) 마을도 그중 하나다. “물속에 잠겨 있던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원래 자리로 옮기는 식으로 마을의 역사적 건축물을 모두 복원했죠.” 그 많은 돌을 사람이 직접 옮겼다고? 가이드의 설명에 반신반의했으나 웬걸, 실제로 마을을 걷는 동안 숫자가 새겨진 돌로 쌓은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순례길다운' 풍경을 간직한 프랑스 길의 작은 산악 마을, 오 세브레이로.
갈리시아 명물인 매콤한 문어요리.
눈 깜짝할 새에 국경을 넘는 즐거움, 포르투갈 길
“오늘은 포르투갈로 갑니다!” 순례길 이틀째 아침, 배낭을 멘 가이드가 해맑은 얼굴로 소리쳤다.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고? 일행의 입이 일제히 벌어졌다.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버스 창밖 풍경에 어리둥절하기를 잠시, 이윽고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e′s)의 출발점인 투이(Tui)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나 포르투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에 선 이 국경 도시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아, 이제 정말 순례길에 들어섰구나’ 하고 실감한다고. 우리는 가이드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잇는 긴 철교를 걸었다. ‘이게 정말 순례길이 맞나?’ 갸웃거릴 때마다 철교 바닥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바람이 불자 길이 약 340km에 달하는 미뇨 강(Rio Miño)이 다리 아래에서 유속을 높이며 도미노처럼 잔물결을 일으켰다. 강 건너편에는 포르투갈의 국경 도시 발렌사 두 미뉴(Valença do Minho)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10여 분 만에 비자나 입국심사 없이 다리 하나를 건너 다른 나라에 도착한 것이다. 포르투갈 땅에 첫발을 디딘 순간, 거짓말처럼 거센 비가 쏟아졌다. 오래전 스페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발렌사의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판초 우의를 뒤집어쓴 각국의 순례자들이 “부엔 카미노(Buen Camino)!”라며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포르투갈 길을 지나는 순례자들.
잠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우리는 갈리시아의 해안 마을 아과르다(A Guarda)의 몬테 산타 트레가(Monte Santa Trega) 산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기원전 1세기경 켈트족이 거주했다는 요새 유적지에는 돌로 쌓은 원형 움막 수십 채가 언덕을 따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그 장엄한 풍경과 마주하는데, 문득 고요한 절에 들어선 듯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 오늘처럼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날에도 순례자들이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내 투어, 포르투갈 해안 길
산티아고 순례길 하면 산이나 들판 같은 대자연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란 화살표는 종종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갈리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 비고(Vigo)를 지나는 포르투갈 해안 길(Camino Portugue′s de la Costa)이 대표적이다. “매일 20~30km씩 고행하듯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심신이 확 지치는 날이 와요. 그럴 땐 도시의 활기를 느끼며 하루쯤 숨을 고르는 게 도움이 되죠.” 가이드가 시장에서 산 싱싱한 생굴에 갈리시아 토착 화이트 품종인 알바리뇨(Albariño) 와인을 곁들이며 말했다. 산뜻한 산미가 감도는 와인을 홀짝이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욱신거리던 종아리 근육이 서서히 풀리면서 ‘순례’와 ‘여행’의 경계가 일순 모호해졌다.
폰테베드라 근교의 작은 해안 마을 콤바로(Combarro). 돌로 만든 곡물 저장고가 줄지어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내에서 에너지를 재충전한 우리는 느슨해진 배낭을 고쳐 메고 ‘걷기 좋은 도시’로 알려진 폰테베드라(Pontevedra)로 걸음을 옮겼다. 중세의 붉은 석조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데다, 도심 대부분이 차량 없는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운영되고 있어 순례자들이 모처럼 부담을 내려놓고 산책하듯 통과하는 곳이다. 우리는 순례자의 수호 성모를 모신 산타 마리아 대성당(Basílica de Santa María la Mayor)과 지금까지 봐온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는 달리 소박한 분위기를 지닌 샌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을 차례로 돌아보며 중세의 짙은 음영을 간직한 항구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버스킹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자, 삼삼오오 모여든 순례자들이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뒤섞인 도시의 활기 속에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아치형 석교, 폰테마세이라.
폰테베드라 시내를 통과하는 순례자들.
가슴 벅찬 순례의 엔딩 크레디트, 피스테라-무시아 길 & 산티아고 대성당
몇몇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기 직전, 마지막 구간에서 방향을 틀어 피스테라-무시아 길(Camino Fisterra-Muxía)로 향한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아치형 석교가 연달아 이어지는 폰테마세이라(Ponte Maceira)와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대서양 끝자락 ‘피스테라(Fisterra)’의 장관을 보기 위해서다. 폰테마세이라에 도착하자 갈리시아 특유의 초록과 회색이 뒤섞인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순례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예요.” 며칠 사이 부쩍 가까워진 가이드가 작게 속삭였다. 일행과 나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석조 다리와 그 아래로 느릿하게 흐르는 이끼 낀 강물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근처 식당에서 마늘에 볶은 조개찜과 새우구이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피스테라로 이동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0km’라고 적힌 조가비 표지석이 해안가 입구에서 우리를 맞았다. 사실상 이곳이 순례길의 종착지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의 바다. 순례길의 공식 종착지는 산티아고 대성당이지만, 많은 순례자가 전통에 따라 대서양 끝자락인 피스테라까지 여정을 이어간다.
어디선가 성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다 쪽으로 걸어가자 높이 5m가 넘는 파도가 해안의 바위를 때리며 새하얀 포말을 분수처럼 쏘아 올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런 바다는 처음이에요.” 일행 중 한 명인 여행 기자가 탄성을 내지르며 카메라를 들었다. 예전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완주를 기념하며 낡은 옷과 신발을 불태우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고. 마침내 당도한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순례자들이 배낭을 베개 삼아 삼삼오오 드러누워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거뭇거뭇해진 그들의 얼굴에서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복잡미묘한 환희가 엿보였다. 불과 일주일 남짓 순례길을 체험한 나도 이토록 벅찬데, 오랜 여정을 마친 그들의 감흥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하루 두 번 순례자 미사가 열리는 산티아고 대성당.
우리는 대성당 앞에서 30분쯤 줄을 선 끝에 하루에 두 번 열리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정오에 열리는 순례자 미사에서는 긴 줄에 향로를 매달아 분향하는 특별한 의식을 볼 수 있어요. 11세기에 순례자들의 악취를 없애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시작된 행사죠.” 가이드가 기대해도 좋다는 표정으로 귀띔했다. 하지만 말만 들어서는 어떤 광경일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미사가 시작되고, 곧이어 사제가 이날 도착한 순례자들의 국적과 출발 도시를 하나하나 낭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새로운 국가 이름이 나올 때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졌다. 순례자 중 한 명이 대표로 연단에 올라 감사 기도를 올릴 때는 ‘나이롱 신자’인 나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미사 끝 무렵, 드디어 가이드가 말하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여덟 명의 사제가 천장에 매달린 줄을 동시에 잡아당기자, 수십 킬로그램짜리 대형 향로가 성당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뜻한 수지 향이 밴 연기가 성당의 공기를 휘저으며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듯 앞뒤로 그네를 타는 향로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신발 끈을 조이고,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에 반드시 도전해 보기로.
강보라
소설가.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티니안에서〉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5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최근 저서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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