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타이베이와 타이페이
대만의 수도를 표기할 때 은근히 헷갈린다. 타이페이인지 타이베이인지 말이다. 이 경우 타이베이(臺北)가 맞다.
타이페이(Taipei)는 영어식 표기다. (타이뻬이 역시, 불필요한 경음화를 동반하는 잘못된 표기다.)
도쿄(Tokyo)를 우리가 영어식으로 '토키오'로 읽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많이 틀리는 것이 규슈(九州/きゅうしゅう)다. 이 지역 명칭 역시 '큐슈'가 아니다.
영어 표기는 'Kyushu'지만, 우리가 정한 일본어 표기는 규슈다.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가 따로 있음을 기억하자. 영어식으로 독음(讀音)하고 그대로 표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일이다.
참고로, 토요타(Toyota) 자동차는 글로벌 브랜드라 회사에서 토요타라고 부르기로 했고, 일본 언론도 영어식 토요타를 따른다.
그러나 창업자 자손이자 현 회장인 도요다 아키오(とよだ あきお)는 우리 외래어표기법의 일본 인명 표기 원칙대로 '도요다'라고 표기하고 발음한다.
◇ 청산가리 유감
'청산가리' 때문에 노동자가 숨진 사건이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차제에 단어 '청산가리'를 좀 뜯어보고자 한다. 청산가리하면 조선시대 사약이나 못 살고 못 먹던 시절 극약/농약/독극물 등을 떠올리게 된다.
촌스럽고 음산하며 케케묵었다. 오랜 세월 꾸역꾸역 안 죽고 살아남은 생명력은 놀라우나, 이제 이 단어는 좀 퇴출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청산가리의 실체는 한자 '靑酸加里'다, 여기서 '가리'는 칼리(Kali)의 음역(音譯)이다. 독일어 칼륨(Kalium)에서 앞부분만 딴 것이다.
영어로는 퍼태시엄(potassium)으로 복잡하다.
청산은 시안(cyaan), 영어로 사이언(cyan)이다. 독어로는 취안(Zyan)이다. cyaan은 원래 네덜란드 말이다. 청소(靑素/靑酸)를 뜻한다.
청산가리는 이제 '시안화(化)칼륨'이라고 정착시킬 때가 되었다. 염화칼슘, 이산화탄소, 일산화질소처럼 말이다. 특히 보도 용어에서 그렇다.
그래야 체계성/통일성/일관성이 선다.
구닥다리 가차음(假借音)이 힘을 잃고 있는 이때, 유독 청산가리만 봐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라파(歐羅巴), 서반아(西班牙), 이태리(伊太利), 네덜란드/화란(和蘭), 폴란드/파란(波蘭), 싱가포르/성항(星港), 샌프란시스코/상항(桑港), 홍콩/향항(香港), 로스앤젤레스/나성(羅城) 등 다양하다.
일견 운치를 느끼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 기억이며, 무엇보다 들치근한 중화사상(中華思想) 언저리에 붙박이는 느낌이 마뜩잖고 언짢다.
잉글랜드(英蘭), 뉴질랜드(新蘭), 아이슬란드(氷蘭), 스리랑카(錫蘭)라고 해봐야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러시아를 더 이상 소(蘇)라고 약칭하는 신문 방송은 없다.
노서아(露西亞)/아라사(俄羅斯)를 소환해 노(露)나 아(俄)가 유용할 법도 한 데 안한다.
왜일까? 구태(舊態)이기 때문이다.
간결해도 글로벌 시대에 맞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심플하게 '러'다. 대학의 학과도 러시아어학과/러시아문학과/러시아문화과가 대세다.
심지어 프랑스도 요즈음 불란서(佛蘭西)를 거의 안 쓰는 추세다. '불란서 빵집/불란서 안경'은 물론 소중한 추억이지만 그렇다.
저널리즘 영역에서는 프랑스라는 엄정함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줄임 낱자도 점점 불(佛)에서 '프'로 가는 추세다.
'청산가리'는 퀴퀴하고 올드하다. 문학 영역이라면 모를까, '시안화칼륨'으로 가는 게 전향적이다.
◇ 애국 중계하던 K선배의 추억
스포츠와 말글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추억이 많다.
이른바 '편파 방송' 혹은 '편파 중계', '편애 중계'와 관련한 내용이다. 한국 선수와 외국 선수, 한국팀과 외국의 중계방송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이 범주에 들어간다.
상대편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편에 대해서 너무도 다른 표현이 넘쳤다. 공정한 스포츠의 세계지만 애국 중계를 반드시 뭐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애국 중계를 아주 잘했던 K선배라는 분이 생각난다.
야구에서 9회 말 투 아웃, 3-1로 지고 있었다. 우리 편 공격은 2할대 '빈타'(貧打)의 8번 타자가 등장했다. 그럼에도 만루 홈런이면 역전, 그리고 축구는 90분 다 뛰고 로스타임(Loss time)이 고작 3~4분 남았는데 스코어는 두 골 뒤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K선배는 중계에서 "아직 시간 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동점 아니 역전도 가능합니다. 우리 선수들, 힘을 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시쳇말로 애국 중계라고 했다. 젊은 누리꾼들은 이제 아무리 우리나라, 우리 편이라도 이런 중계가 옹색하고 불편하고 안쓰럽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80~1990년대 우리 TV는 모두 애국 중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K선배의 권투 중계는 애국 중계의 끝판왕쯤 될 것이다.
심판이 우리 선수에게 불리하게 하면, K선배는 "레프리가 이상해요. 왔다 갔다 하고 말이죠. 배정될 때부터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라고 중계했다.
반면 우리에게 유리하면 "아주 공정해요. 심판 잘 보네요"라고 말한다.
경기 후반, 상대 선수가 비틀대면 "빨리 경기 중단시켜야지 뭐 합니까? TKO 선언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지친 우리 선수에게 심판이 걷기 계속 의사를 물어보면 "왜 이럽니까? 멀쩡한 선수한테 저러면 안 되죠"라고 한다.
코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대 선수가 해롱대면 "수건 안 던지고 뭐 하나요? 선수 보호가 최우선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게 우리 선수면 "그렇죠. 저렇게 말을 계속 걸어야해요. 네, 눈 똑바로 보고요. 잘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상대 선수가 아웃복싱으로 링을 빙빙 돌기만 하면 "놀러 왔나요? 권투 선수가 저러면 안 되죠"라고 한다.
우리 선수가 똑같이 하면 "발놀림이 좋아요. 경쾌합니다"고 한다.
상대가 인파이터면 "부르도자(불도저)예요, 부르도자! 무턱대고 파고들기만 하네요".
우리 선수가 공격적이면 "권투는 저렇게 하는 거죠? 네, 좋아요"라고 한다.
상대가 조금 힘이 빠진 기색이 보이면 "안 되겠어요. 발이 풀렸죠? 눈동자도 힘이 없어요"라고 한다.
우리 선수가 지치면 "권투는 15회까지니까요. 훅 한방이면 경기 끝나는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한다.
상대 선수가 버팅(butting, 머리를 들이받는 반칙)을 자주 하면 "의도적이에요. 매너가 참 안 좋네요" 하면서, 우리 선수가 하면 "상대가 버팅을 유도하고 있어요. 저건 당연한 방어거든요. 매 맞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한다.
상대 신수가 헤드워크를 잘하면 "요란하네요. 저런 게 다 자신이 없다는 얘기 아니겠어요?"라고 하면서 우리 선수가 그러면 "몸이 가벼워요. 네, 저렇게 상대를 교란시켜야 합니다"고 말한다.
우리 선수가 질 줄 알았는데 이기면 "오늘 레프리들이 공정했어요. 참 다행입니다"고 하면서 우리 선수가 이길 줄 알았는데 패하면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요즘도 캐스터들이 자주 쓰는 이 표현, 모르긴 몰라도 K-선배가 원조다!), 이럴 수가 있나요?" 하면서 강하게 외친다.
이쯤 되면 이분이 누군지 밝힐 필요가 있다. 고(故) 김재영 KBS 아나운서다. 서울고와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거침없고 호방했다. 포장마차에 가면 한겨울에도 꼭 간처녑을 시켰다. 사내들은 그런 걸 먹어야 한다면서, 담배도 하루 두 갑을 피웠다.
어느 날이던가, 아침에도 연기를 피우길래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선배님, 소리 갈라지지 않으세요? 괜찮으세요?"라고 했더니만 "담배 몇 모금 피웠다고 소리 안 나오면 그게 아나운서냐?"라고 불호령을 울렸다.
그랬다. 가끔 그의 '애국 중계'가 몹시도 그립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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