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예술가가 아마존에서 체득한 숲과 친구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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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예술가가 아마존에서 체득한 숲과 친구되는 법

엘르 2025-12-05 07:42:51 신고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Daniel Steegmann Mangrané)가 자연을 말하는 방식은 시와 무척 유사하다. 오는 3월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장에 상영되는 영상 ‘물고기가 입 맞추는 달’(2025)만 봐도 그렇다. 경주 월지 수면에 비친 달을 보고 그 안의 물고기가 달에게 입을 맞추는 상상이라니. 이 바르셀로나 태생의 작가에게 자연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는 ‘감각의 대상’이다. 어려서부터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탓에 대학 졸업 후 20년 넘게 브라질에서 지냈고, 아마존에서 마주한 자연의 맨얼굴을 사진과 영상, 설치미술 등으로 전환해 왔다. 얇은 일직선 조명이 요란하게 내리치는 번개를 대변하듯 다니엘 스티그만의 은유와 왜곡은 자연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쇠사슬 커튼을 열어젖히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숲의 한가운데 있다.


어린 시절 꿈이 생물학자였고, 8~9살 때부터 아마존에 가고 싶어할 정도로 자연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죠

말씀처럼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연에 강하게 끌렸어요. 일례로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제럴드 다렐(Gerald Durrell)의 책을 읽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그리스 코르푸 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쓴 그 책을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자연을 마음껏 누비는 ‘야생의 아이’ 같은 화자에 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했죠. 학교를 그만두고 동물을 연구하러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어요(웃음).


수학에 재능이 없어 생물학자는 못 됐지만 대신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작업의 중심에 자연을 두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제가 예술을 택했다기보다 예술이 저를 택한 것 같습니다. 예술은 제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고,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수단이에요. 또한 기후 위기라는 긴급한 상황에서 예술은 이 세계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과학이나 정치적 담론, 저널리즘만으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아요. 우리에겐 완전한 문화적 전환이 필요하고, 문화는 분명 예술을 통해 만들어지니까요.


바르셀로나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 졸업 후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브라질에서 보냈어요.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오래 머물게 만들었는지

어릴 때부터 아마존과 판타나우(Pantanal) 이 두 지역에 강박적으로 끌렸어요. 여기에 리지아 클락과 엘리오 오이치시카라는 두 브라질 아티스트는 예술을 향한 제 시선을 완전히 바꿨죠. 쉽게 말해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브라질에 있더군요. 처음 브라질에 간 건 2004년, 원래 계획은 3개월만 있는 거였어요. 한 달은 열대우림에서 보내고 나머지 두 달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엘리오 오이치시카를 연구하려 했는데 그 세 달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더군요. 3개월씩 비자를 연장하다 아예 눌러앉게 됐고 그렇게 20년이 흘렀어요. 지금은 아내와 아이가 있어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며 리우데자네이루를 틈틈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염원하던 아마존에 처음 당도한 순간 기분이 어땠나요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죠. 수많은 생명이 서로 얽혀 대화하는 모습이 가장 와닿았어요. 그 엄청난 ‘의식의 그물망(sentient web)' 안에 저는 완전히 잠겼죠. 유럽은 자연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더 이상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감각이 안 드는데, 열대우림에는 자연과의 거리라는 게 없더군요. 더위와 습기를 비롯한 모든 것이 온몸에 들러붙어 저능 그냥 숲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이렇게 온 신체와 감각이 잠식되는 경험은 이후 제가 전시를 만드는 방식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아마존은 매혹적인 자연인 동시에 혹독한 야생이죠. 어떤 방식으로 그곳을 탐구했나요

보통 원주민 가이드와 함께 움직입니다. 저는 아마존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 마나우스(Manaus)에서 여정을 시작했어요. 일곱 명 정도가 함께 출발해 대부분 이틀째에 투어를 마치고 두세 명만 남아 여정을 이어가죠. 숲을 걷다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밤에는 해먹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원주민 공동체를 방문해 그들의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갖고요. 함께한 가이드는 정말 박식했어요. 누군가 염증이나 두통을 호소하면 식물을 채취해 약을 만들어주는 등 자연에 관해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죠. 그를 통해 숲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숲은 모든 것이 얽힌 카오스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하나하나가 의미이고, 기능이고, 관계를 지닌 존재였어요. 사물을 분리해 이해하려는 서구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었죠. 관계를 중시하는 이 사고방식은 제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저는 작품이 예술가나 관람자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역동성을 중시하게 됐어요.


당신의 작업은 단순히 자연을 표현하는 데서 나아가, 더 깊이 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친구되기Befriending the Mountain〉라는 전시명이 더욱 와닿아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인가요

에르메스로부터 전시 제안을 받고 한국의 정원과 샤머니즘, 역사, 시, 철학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궁궐을 보며 한국은 자연을 인간을 보호하는 더 큰 존재로 여긴다고 느꼈죠. 인간을 강이나 돌, 소나무 같은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태도도 신선했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산과 친구되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대표작 역시 전시와 같은 제목이 붙었죠. 알루미늄 커튼 오브제 ‘산과 친구되기’(2025)를 통과하는 경험은 굉장히 오묘했어요. 차갑고 단단한 금속 체인을 젖히는 순간이 마치 풀숲을 헤치는 것 같았거든요

알루미늄 커튼 작업은 약 10년 전, 물질과 비물질, ‘몸을 인지하는 경험’과 ‘몸을 넘어서는 감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개념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 어린 시절 집이나 가게 입구에서 보았던 체인 커튼을 떠올렸죠.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 바람은 통하게 하고, 벌레를 막는 용도였죠. 이 익숙한 사물을 전혀 다른 감각의 전환하고 싶었습니다. 커튼은 전시장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이자 하나의 포털처럼 작동합니다. 가운데 구멍 역시 무엇인가를 닮았지만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형태로,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죠.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확신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어요. 이 작품을 통과하는 순간만큼은 ‘순수한 만남’을 경험하길 바랐습니다.


앞서 말한 작품처럼 인공 재료로 강렬한 몰입의 경험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나뭇가지나 돌 같은 자연 요소를 직접 작품화하기도 하죠. 구멍 난 나뭇잎 사이로 빛을 통과시킨 ‘우아함과 체념(Elegancia y renuncia)’(2011) 역시 볼수록 의도가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저는 나뭇잎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나뭇잎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죠. 그래서 그것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드러내, 마치 난생처음 마주하는 대상처럼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싶었어요.


각기 다른 모양의 바위 옆에 놓여 번개를 상징하는 LED 필라멘트 전구에도 줄곧 시선이 갔습니다. 이토록 곧고 우아하게 안착하는 번개라니요. 이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몇 년 전 ‘숨쉬는 선(Breathing Lines)’이라는 필라멘트 작업을 파리에서 헬싱키 키아스마 미술관에 옮기던 중, 큰 온도 차 때문에 조명이 계속 깜빡였어요. 밤에 미술관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뜻밖에도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이후 원래 의도대로 고쳤지만 번개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계속 머리에 남았어요. 저는 작품이 설치되는 환경 조건 이를테면 온도, 기압, 습도 같은 것도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우연한 순간이 결국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의 작업은 우리가 자연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결의 감각’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 가장 시급한 일은 그 연결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고, 그 결과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됐죠. 이 감각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어요. 언젠가 이런 표현을 본 적 있어요. “정치적인 미술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미술을 하거나.” 안타깝게도 ‘생태적’이라고 말하는 많은 작품이 정작 자신이 비판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로 말하는 것 같아요. 단지 자연을 소재로 삼기보다 자연이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며 존재하는지 다루는 것이 제겐 더 중요합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당신의 작품 중 ‘A Dream Dreaming a Dream Dreaming’(2020)이라는 영상을 인상 깊게 봤어요. 가느다란 광선으로 표현된 흑표범이 어둑한 숲을 거니는 영상은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자연의 존재감을 생생히 드러내더군요

2015년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를 위해 제작한 VR 작품 ‘Phantom’이 출발점이었습니다. 레이저 스캔으로 만든 3D 열대우림은 수백만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포인트 클라우드’로, 매우 추상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공간이죠. 이후 팬데믹 기간 TBA21의 커미션을 받았을 때 이 숲을 배회하는 표범을 떠올렸습니다. AI까진 아니지만 약간의 지능을 부여해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로 만들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표범은 바르셀로나의 한 서버에 마련된 디지털 숲을 걷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철학사의 오랜 질문과 맞닿아 있어요. “숲 한가운데서 나무가 쓰러질 때, 아무도 듣지 않으면 소리가 날까?”라는 인식에 관한 물음이죠. 저는 이 질문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숲에는 이미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들은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을 즉시 감지해요. 사람이 듣지 않는다고 그 소리가 사라질까요? 마찬가지로 아무도 보고 있지 않더라도, 표범은 계속 숲을 걷고 있습니다.


‘꿈속의 꿈속의 꿈’이라는 뜻의 작품명처럼 아득한 숲속을 배회하고 있을 표범이 떠오릅니다. 당신 역시 자연을 헤매는 꿈을 꾸나요

그럼요, 아주 자주요. 바라건대 언젠가 자연이 꾸는 꿈에도 제가 나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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