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살을 에는 날씨였다. 전동휠체어 조이스틱 위로 오른 장갑 사이로 드러난 붉게 튼 손끝들이 올 겨울 처음으로 찾아온 한파를 여실히 나타냈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떠들썩한 국회 앞에서 광장의 자리를 지키고 기본권을 보전하기 위해 장애인들도 거리로 나왔다.
2025 국제장애인의 날을 맞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이하 한자협)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3일 오후 2시 30분 국회 앞에서 정부에 ‘장애인자립생활지원시설’ 정책 즉각 중단과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기능·지원 강화’ 공약 이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2000명(집회 측 추산)이 넘는 장애인이 추위를 뚫고 아스팔트 위로 휠체어를 구동했다. 무대를 앞두고 걸음을 멈춰서는 운동화와 구두 사이로 바퀴와 흰색 지팡이가 나란히 자리잡았다. 줄로 매달아 둔 피켓이 칼바람에 나부끼고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흩어지지 않았다.
한자협은 먼저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대응해 전장연과 함께 국회 앞에서 세계장애인의 날 결의대회를 열고 야간 농성을 벌였던 일을 상기했다. 협의회는 “시민과 장애인 당사자의 힘으로 내란을 막아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장애인의 권리는 제자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며 내란 청산과 사회대개혁을 공언했음에도, 장애인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조치는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한자협은 보건복지부가 추진한 ‘장애인자립생활지원시설’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협의회는 이 정책이 “이기일 전 보건복지부 1차관과 이종성 전 국민의힘 의원 등 내란 세력의 정략적 산물”이라고 지적하며, 단순한 제도 신설이 아니라 “장애인의 지역사회 삶을 기반부터 흔드는 대형 사기극”이라고 규정했다.
협의회에 따르면 자립생활센터가 수년간 겪어온 열악한 운영환경은 정부의 지속적인 저평가, 비현실적 기준에 따른 차별적 평가, 예산 구조의 취약성에서 비롯됐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비(非)복지시설’이라는 지위를 문제 삼아 오히려 센터를 제도 밖으로 밀어내고, 시설 편입 논리를 통해 자립생활 운동을 분열시키려 했다는 주장이다.
결국 자립생활센터는 2023년 12월 8일 국회를 통과해 장애인복지시설로 편입되게 됐다.
이들은 ‘TV는 사기를 싣고’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립생활센터 복지시설화를 비판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이형숙 회장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2006년부터 장애인복지법 제54조에 독자적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복지시설화되고 말았다. 국가는 더 이상 장애인의 생활과 생사를 무시하지 말고 자립생활센터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또 한자협은 이재명 정부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기능 강화 및 지원 확대’를 국정과제로 제시하고도 정작 기존 자립생활센터보다 자립생활지원시설 정책을 우선 추진하며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현장을 찾은 장애인들은 이 같은 취지에 공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애인 당사자인 의정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재희 센터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소리 높여 외치고 행동하는 만큼 분명히 변화가 생긴다”며 그 변화의 사례로 전에 비해 늘어난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를 언급했다.
그가 가장 바라는 변화가 무엇인지 묻자 이 센터장은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며 “비장애인보다 더 많이 달라거나 더 잘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헌법상의 기본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끝으로 “이 대통령이 당선 당시 약속한 대로 장애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꼭 인정해 주길 바란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부심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신경써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날 밤 11시 39분 국회는 본회의 끝에 합의된 728조원 규모의 2026년도 예산안을 가결했다. 이는 이재명 정부의 첫 예산으로, 지난해 편성된 본예산 673조원보다 8.1% 증가한 규모지만 장애계에서는 “이 정부가 끝내 장애인 권리를 외면했다”고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전장연은 이날 성명문을 발표해 “2026년 예산안에서는 오히려 장애인거주시설 기능보강 예산이 증액됐고,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감옥 같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는 또다시 외면당했다”며 “29명의 중증장애인이 단식을 진행하고 농성을 이어가며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쳤지만 활동지원 예산은 극히 일부만 반영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상임위에서 통과됐던 활동지원급여 단가 인상과 24시간 활동지원 제공은 사라졌고, 가산급여 단가 인상은 몇백 원 수준에 그쳤다”며 “장애인들이 꾸준히 요구해 온 장애인권리예산 또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년째 국제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온 장애인 당사자 김은숙씨는 그의 활동지원사 주재영씨와 함께였다. 김씨는 본보에 “장애계가 요구한 예산이 예산안에 거의 반영되지 않아 이를 바로잡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명확히 발음되지 않는 입으로도 “동지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고 또렷히 소망했다.
김씨와 함께 거리로 나선 활동지원사 주씨는 이번이 첫 참여다. 그는 “직접 현장에 와 보니 힘차고 좋다”며 “장애인분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가까이에서 봐 왔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평등한 권리와 일자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한자협과 전장연은 국회의사당역 9호선 5번 출구 앞부터 여의도공원까지 추위를 뚫고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행진’을 진행했다. 오후 7시부터는 12·3 비상계엄을 규탄하고 ‘12·3 내란’을 척결하는 문화제를 열었다. 2025년 국제장애인의 날을 맞아 진행한 이번 행사는 이날부터 오는 4일까지 이어지는 1박 2일 전국결의대회의 일환이다.
[미니 인터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이형숙 회장
이형숙 회장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이형숙 회장은 무대 위에서 굳은 목소리로 장애인의 권리를 외친 뒤, 곧장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응원하던 장애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는 다시 무대를 바라보며 다른 발표자에게 연신 박수를 보내며 누구보다 먼저, 또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현장을 지켰다.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도 동료 활동가들을 따뜻하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그가 말하는 ‘함께 사는 지역사회’의 의미가 자연스레 드러났다. 그에게 이번 결의대회의 의미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Q. 12·3은 국제장애인의 날인 동시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다. 추운 날씨에 거리로 나온 장애인 당사자분들께 한마디 하시자면.
우리가 거리로 함께 나와 직접 외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장애인은 집이나 시설에만 갇혀 지내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Q. 전날 국회 예산이 통과됐다. 이와 관련해 이재명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장애인이 감옥 같은 집단 거주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이동권·교육권·노동권 관련 예산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는 기본적 권리를 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보장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재명 대통령께 정확히 묻고 싶다. 장애인도 대한민국 국민주권의 주체로 함께할 수 있게 하시겠는지. 이를 위해서는 이동권·교육권·노동권을 예산으로 사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인지.
Q. 앞으로 장애인 인권을 위해 어떤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인지.
2026년 예산에 반영되지 못한 요구안이 2027년에는 반드시 포함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더 강력히 투쟁하겠다. 법 개정과 예산 반영이 모두 필요하다. 장애 인권이 예산과 정책으로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위해 앞으로도 멈추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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