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이 디자인 분야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디자이너와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내가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체념에 가까운 얘기다. 그러나 정작 위기의 본질은 AI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가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교육·산업 구조에 있다.
창의성의 기준과 역할이 이미 바뀌었는데, 여전히 과거의 잣대로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생성형 AI가 무너뜨린 '형태=창의성'의 시대
과거 디자인 교육과 업계에서 창의성은 대체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독창적인 레이아웃, 색채 배합, 조형 언어, 그래픽 스타일은 곧 디자이너의 실력 척도였다. 하지만 달리(DALL·E), 미드저니(Midjourney),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런웨이(Runway)와 같은 생성형 모델이 등장하면서, '형태' 그 자체는 기계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자동 생성할 수 있는 요소가 됐다.
최근 연구를 보면, AI 기반 이미지 생성 도구는 기획 단계에서 이미지를 대량으로 자동 생성하고, 다양한 스타일·구도를 제안함으로써, 인간 디자이너의 발상 공간을 폭발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동시에 '형태를 새로 만드는 일' 자체의 희소성과 난도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과거라면 일주일 걸리던 스케치·시안 작업이 몇 분 안에 수십, 수백 장 단위로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저 '무언가를 새롭게 그려낸다'는 이유만으로 창의성을 주장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제 창의성의 무게중심은 형태 이전의 단계, 즉 사고 과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기준과 관점을 설정하며, 어떤 맥락과 가치를 설계하는가가 훨씬 중요한 차별점이 됐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왜 이 문제를 이렇게 정의하고, 이 방향으로 풀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환경 변화가 우리 손에 쥐어진 도구들과 결합하면서, 디자인의 기반 자체를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직전 칼럼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어려서부터 템플릿과 프리셋에 익숙하다. 프레젠테이션 템플릿, 포스터 템플릿, 인스타그램 리얼 템플릿, UI 키트까지, 이미 완성된 형식을 가져와 콘텐츠만 채워 넣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졌다. 이 과정에서 '비우고 시작해 스스로 구조를 짜보는 경험'이 점점 줄어든다.
그다음으로는 많은 디자인 교육기관의 커리큘럼이 도구 중심·산업 맞춤형으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조형 기초·시각 언어·비평·인문학적 기반 등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영역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점을 들 수 있다. '몇 학점 안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취업'이 최우선 목표가 되면, 느리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실험과 실패의 시간은 쉽게 삭제된다.
마지막으로 생성형 AI는 통계적 평균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방대한 학습 데이터 속에서 가장 그럴듯한 패턴을 조합해 내놓는 것이 기본 원리다. 이른바 'AI의 평균화 메커니즘'이다. 짧은 시간 안에 '적당히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뽑아주는 덕분에, 클라이언트와 사용자 모두 빠르고 익숙한 형식을 선호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디자인은 '위험을 감수하는 실험'이 아니라 '검증된 패턴을 재조합하는 작업'이 되고, 감각과 사고의 스펙트럼은 점점 좁아진다. 또한 디자이너는 스스로를 '툴 오퍼레이터'로 축소하게 된다.
최근 해외 조사에서 디자이너의 상당수가 AI가 창의성을 약화한다고 응답한 것은, 도구 자체보다 이렇게 압축된 작업 환경에 대한 불안의 반영에 가깝다.
◇ 금지할 수 없다면, '쓰는 방식' 바꿔야
이 구조적 문제는 'AI를 덜 쓰자', '템플릿을 쓰지 말자'는 식의 도덕적 호소로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디자인 업계는 이미 AI를 깊이 도입했고, 앞으로도 그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다.
AI는 창작 행위를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프레임을 넓히는 실험 장치로 다뤄져야 한다. 빠르게 결과를 뽑아내기 위한 '마감용 엔진'이 아니라, 평소라면 떠올리지 못했을 구도·구성·메타포를 시험해 보는 '측면적 사고(lateral thinking)의 촉매'로 써야 한다.
예컨대, 한 가지 콘셉트만 AI에 반복시키기보다, 문제 정의와 컨셉을 바꾸어가며 전혀 다른 방향의 결과를 일부러 뽑아보고, 그 사이에서 예상 밖의 패턴, 상충하는 지점, 틈새를 발견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여기서 방향성 설정·우선순위 결정·최종 선택은 반드시 인간 디자이너의 몫으로 남아야 한다. AI가 내놓은 수십 개의 시안 중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 왜 이 선택이 타당한가, 어떤 사회적·문화적 함의를 가져오는가'를 묻는 행위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템플릿 역시 마찬가지다. 템플릿은 결과물의 '정답지'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과감히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기초 문법' 정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드를 일부러 어긋나게 재배치해 보는 시도, 컬러 시스템을 뒤집어 통념과 다른 감성을 설계해 보는 실험, 상호작용 흐름을 '사용자-시스템-사용자'의 순환 구조로 재편하는 연구 등이, 새로운 디자인 언어의 출발점이 된다.
이때 중요한 역량은 '템플릿을 잘 활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템플릿이 전제한 세계관과 규칙을 읽어내고, 그 바깥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상상하는 능력이다.
◇ 불확실성과 실험 회피할수록, 창의성 사라져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원래부터 불확실성과 실험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하는 일, 기존 미감을 뒤집는 시도를 하는 일, 사용성·편의성을 다르게 해석해 보는 일은 항상 일정한 실패 가능성과 비난의 위험을 안고 있다.
AI와 템플릿은 이 위험요소를 가장 먼저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미 검증된 패턴을 빠르게 재현해 주고, 평균적인 취향을 만족시켜 주며, '실패할 확률이 낮은 답안지'를 제시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는 프로젝트 리스크를 줄이고, 산업구조를 효율화하는 데 분명 이득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바로 그 효율성이 디자이너의 감각과 사고 근육을 약화하는 가장 큰 압력으로 돌아온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불편함을 견디면서 감각을 벼리는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결책은 도구를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AI는 '더 빨리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과감하게 상상하게 만드는 기술'이 돼야 하고, 템플릿은 '지시문'이 아니라 '균열을 낼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기술이 뽑아주는 평균값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디자인은 정체된다. 반대로 그 평균값을 의심하고, 변칙을 도입하고,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하는 순간, 디자인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 남는 건 '질문하는 능력'
지금 디자인 업계가 가장 빠르게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능력이다. 바로 '질문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 서비스 구조는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가. 이 시각 언어는 어떤 가치와 권력관계를 재현하고 있는가. 무엇이 더 적합하고, 무엇이 더 타당하며, 무엇이 진짜 새로운가.
이런 질문은 자동화될 수 없다. AI에게 '더 창의적으로 만들어줘'라고 요청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창의적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가'는 질문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디자이너는 기계보다 비싼 출력 장치 이상이 되기 어렵다.
AI 시대에 디자인 전공자와 종사자가 느끼는 불안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AI가 너무 유능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 질문하지 않는 교육, 평균값만 원하는 클라이언트와 시장이 함께 만들어내는 구조에 있다.
미래의 디자인은 지금보다 더 많은 알고리즘과 데이터, 자동화된 툴 위에서 작동할 것이다. 그 위에서 여전히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도구를 더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문제를 정의하고, 가장 집요하게 질문하며, 끝까지 책임 있게 선택하는 사람일 것이다.
창의성 또한 더 이상 '손으로 무엇을 새로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디까지 의심하며, 무엇을 위해 이 형태를 선택했는가'로 측정되는 시대가 됐다.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디자인의 미래는 아직, 그리고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기업 (주) 카우치포테이토 대표.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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