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2월의 서울은 공연장의 조명이 더욱 선명해지는 계절이다. 늦은 오후의 차가운 공기를 지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 들어서면, 오래된 악기의 숨결이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올해 그 공간의 가장 특별한 무대는 가야금 연주자 김일륜이 준비한 산조 여섯 바탕의 짧은풀이 공연이다. 여러 유파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도 관객의 기대를 자극하지만, 그 너머에는 50년 넘게 악기를 놓지 않은 연주자의 시간과 호흡이 겹겹이 쌓여 있다. 무대는 그 시간들을 한꺼번에 꺼내 펼쳐 보이는 서랍처럼 열릴 것이다.
가야금 산조 여섯 바탕을 한 공연에 담아내는 작업은 고된 준비를 요구한다. 각 산조가 지닌 구조와 정서가 다르고, 흐름을 이어가는 방식 또한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김일륜은 오랜 기간 이를 스스로의 호흡에 맞게 재정비해 여섯 바탕을 짧은풀이로 배열했고, 이번 무대를 위해 다시 한 번 뼈대와 선율을 점검했다. 김일륜의 연주에는 유파 사이의 경계를 흩뜨리지 않는 결의 분명함이 있다.
이번 공연에서 김일륜은 지난 30년 동안 11차례에 걸쳐 완주했던 최옥삼류, 황병기류, 성금연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신관용류 산조를 다시 펼친다. 각각의 산조는 시대와 전승자에 따라 태생적으로 다른 질감을 품고 있으며, 이들을 하나의 공연으로 엮는 과정은 길게 이어진 산조의 역사 위에서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일과 같다. 김일륜은 이 흐름을 무게 있게 구성하며 관객에게 여섯 바탕의 개성과 깊이를 전할 준비를 마쳤다.
김일륜의 산조 여정은 처음 가야금을 손에 올렸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금연류 산조는 그의 출발점이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한 손끝의 감각을 익히게 해준 작품이었다. 산조를 배우며 형성된 기본기와 감각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의 연주의 바탕으로 남아 있다.
이후 만난 신관용류 산조는 그에게 음악적 중심을 다시 잡게 한 경험이었다. 깊은 계면 조율은 감정의 흔들림을 정돈하는 구심점이 되었고, 산조라는 장르가 단순한 연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신관용류가 지닌 골격은 김일륜의 연주세계에 단단한 구조를 형성했다.
대학 시절 접한 최옥삼류 산조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우조의 힘과 기세가 더해진 선율은 그 시기의 감각과 맞닿아 있었고, 김일륜은 이 산조를 통해 가야금이 가진 강렬한 면모를 새롭게 발견했다. 최옥삼류의 구조적 탄력은 이후 다른 산조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해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김죽파류 산조와의 만남은 보다 섬세한 결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선생의 악보 채보 작업을 도우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여성적이고 세밀한 선율은 김일륜의 연주에 섬세함을 더했다. 이 산조는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지닌 부드러운 곡선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는 김일륜에게 예술적 확장의 기회를 가져다준 작품이었다. 황병기 명인에게 직접 배우는 과정은 전통의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감각을 연주에 녹여내는 방법을 고민하게 했다. 명료한 구성 속에 감각적 해석이 가능한 이 산조는 김일륜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박사 과정에서 체득한 김병호류 산조는 김일륜의 표현 폭을 한층 더 넓혔다. 이 산조는 생기와 탄력을 머금고 있어, 연주자의 리듬 감각과 감정선의 균형을 요구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연주를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고, 청춘 같은 활력이 더해진 새로운 흐름을 손끝에 담았다.
이번 공연은 여섯 바탕의 개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다. 각 유파의 색을 세밀하게 구분해 표출하고, 흐름과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전체 공연 구성에 신중을 기했다. 산조의 긴 여정이 한 무대에서 이어지는 만큼, 여섯 선율이 서로에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도록 짜임을 다듬는 작업이 있었다.
함께 무대에 오르는 장구 연주자 이태백 교수(목원대학교)는 오랜 파트너로서의 안정적 호흡을 더한다. 장단은 산조의 중심축이며, 그의 연주는 여섯 바탕의 흐름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맡는다. 장구의 리듬은 공연 전체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며 산조의 묘미를 극대화한다.
해설은 송혜진 교수(숙명여자대학교)가 맡아 관객에게 산조 여섯 바탕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레 풀어낸다. 김일륜과 오랜 인연을 가진 만큼 음악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산조의 시간적 층위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음악적 서사를 매끄럽게 전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무대는 한 연주자가 걸어온 시간이 여섯 산조라는 형태로 응축되어 펼쳐지는 장면이다. 전통음악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고, 오랜 시간 국악을 지켜본 이들에게는 지난 세월의 축적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50년의 호흡이 흐르는 가야금 소리가 우면당을 채우는 순간, 산조는 또 한 번 현재의 음악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김일륜의 가야금산조 여섯바탕 ‘작은 판’은 오는 14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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