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남인우(51)는 예술교육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깊이 고민하고 연극을 통해 이를 실천하는 연출가다. 그는 진정성 있는 예술교육과 예술 무대가 우리의 사고와 신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극단 북새통과 함께 지난 20여년간 공연과 놀이, 예술과 교육의 경계 사이에서 예술교육의 확장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해 왔다.
지난여름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한 국제개발협력(ODA) 사업을 필리핀 현지에서 진행했다.
"필리핀에서도 톤도는 가장 열악한 환경이에요. 전 세계의 쓰레기가 모이는 쓰레기 도시로도 유명한 곳이죠. ODA는 그곳의 지역 예술가와 교사가 예술교육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에요.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프로그램'의 이식이 아닙니다. 예술의 본질을 깨닫게 해서 그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자력을 키우는 데 있죠."
타국에서, 그것도 반신반의하는 불안한 시선 속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스스로를 믿게 하는 일, 남인우에게 예술교육은 그런 것이었다.
톤도의 아이들은 쓰레기를 재활용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했고, 자신의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향후 3년간 진행될 예정이다.
"필리핀에서 오자마자 덴마크도 다녀왔어요. 코펜하겐에 '바티다'(BATIDA)라는 극단과 북새통이 오랫동안 협력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바티다 단원들은 모두 연주하면서 춤과 노래를 하는데, 상당히 개성적이어서 해외 페스티벌에서 인기가 높아요. 북새통과 본격적으로 작업한 건 10년 가까이 되죠. 같이 만든 작품은 코펜하겐과 서울에 오가며 공연합니다."
덴마크의 극단 바티다는 음악과 춤, 유머가 결합한 어린이 청소년극으로 유명하고, 북유럽에서는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팀이다. 2000년 아시테지(ASSITEJ) 한국지부 초청으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초청되면서 이제는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연간 수십 차례의 해외 순회공연뿐 아니라 민간 교류로 북한 공연까지 성사했던 이력은 이 작은 단체가 국제적인 어린이 청소년극 네트워크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다. 2015년에 송애경(당시 아시테지 한국본부 이사)은 북한 공연을 민간 프로젝트로 추진했던 바티다 극단의 연출가 소렌 오베센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북한 사람들이 세상 밖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들에 대하여 모릅니다. 세상을 발전시키려면 잘못된 이미지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필요하죠.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아주 작은 연극 다리를 놓았을 뿐입니다."('2015어린이청소년극 포럼' 발췌)
바티다 극단의 작업 방식은 남인우와 극단 북새통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특히 악가무를 겸비한 배우들과 장기간의 순회를 거치면서 서서히 숙성시켜 가는 극단의 호흡은 북새통과도 자연스럽게 겹친다.
"2002년에 김우옥 선생님이 바티다를 초청해서 '오버추어'(overture)라는 작품을 하기로 했는데,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셨어요. 이전부터 팬이었으니까 저는 너무 좋았죠. 죽음이 소재인데도 작품이 정말 재밌었어요. 남녀 배우들이 모두 까만 드레스와 연미복을 입고, 같은 단발머리 가발에 매부리코 안경을 써요. 그러고는 악기를 하나씩 들고나와서 연주를 하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관객석이 떠들썩했죠. 내가 나중에 극단을 만든다면 바티다 극단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노래, 춤, 악기 연주까지 가능한 배우를 모아 남인우는 2003년 극단을 창단했다. 상상과 변형을 주요 맥락으로 삼는 놀이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극단의 첫 작품은 학교 졸업 프로젝트였던 고승덕 작 '가믄장아기'(2003)였다.
제주의 여성 설화를 바탕으로 한 '가믄장아기'는 2004년 서울어린이연극제에서 우수작품상, 극본상, 연기상을 받은 후 5년간 12개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한국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프랑스 연극이론가 파트리스 파비스는 가믄장아기에 대해서 "소박하고 꾸밈없는 공연이지만 힘과 생명력이 넘친다"며 "배우-무용수-가수-악사가 총체극 이상의 완전한 공연을 만들어냈다"고 호평한 바 있다.
"가믄장아기를 공연하러 해외 페스티벌에 가면 늘 바티다를 만났어요. 그러다가 그들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죠. 그들은 악보를 볼 줄 몰라요. 놀랍죠? 저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게 진짜 음악성이고 예술성이잖아요. 형식이나 규칙에 갇히지 않는 자유 학교가 덴마크에서 나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이론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이라는 걸, 덴마크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부터 배우는 것 같아요."
남인우는 가믄장아기를 만들 때부터 국내외 순회공연을 염두에 뒀다. 그래서 봉고차 한 대에 무대와 배우를 싣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장비를 간소화했다. 조립식 병풍을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직접 설계해 제작을 맡기고, 변형을 위해 부착식 천을 덧댔다. 악기를 제외한 장치는 대부분 소품으로 구성돼 무대 셋업은 30분이면 충분했다. 공연의 무게중심은 온전히 배우였다.
"그때 제가 유네스코 어린이 인권에 완전히 꽂혀 있었거든요.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산간벽지 아이들도 볼 수 있게 우리가 찾아가서 공연하자고 했죠. 그래서 경남 합천, 강원도 산골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고, 폐교에서 자면서 공연했지요. 국가와 정부가 해줘야 할 일을, 겁도 없이 우리가 했던 거예요. 덴마크나 스웨덴의 극단들은 정부로부터 '국립'의 지위를 인정받으면 국가 지원으로 벽지를 순회해요. 누구나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면, 국가는 마땅히 그렇게 해줘야죠. 가믄장아기는 그렇게 전국을 돌면서 더 탄탄해진 공연이었어요."
대한민국 헌법 9조에는 국가가 문화 발전과 국민의 문화적 권리 보장의 의무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구체화한 문화기본법은 10여 년 전에야 제정됐다. 남인우가 말하는 '누구나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명백하게 법으로 규정돼 있는 국민의 권리다. 북새통의 순회공연은 이 권리가 실제 현장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지를 자문자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믄장아기 공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어요. 운동장 너머로는 경운기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여름에 조명 팔로우를 하면 입으로 들어오는 벌레를 각오해야 했죠. 그래도 너무 좋았어요. 러시아에서는 한 할머니가 공연 후에 배우들 손에 뭔가를 하나씩 쥐여주시면서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내 삶을 너희가 보여준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저희가 다 울었어요. 그 선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감동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전통적인 소재와 형식을 가진 이 작품이 해외에서도 깊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흔치 않은 여성 서사에다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지켜낸다는 인류 보편적 주제를 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쉽고 재밌게 구성된 춤사위와 개성 있는 몸짓은 아이와 어른, 서로 다른 문화권의 관객을 모두 함께 품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일반적인 성인극은 아이들이 함께 보기에 적절치 않은 소재나 형식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어린이 청소년극은 아이를 향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성인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어린이 청소년극을 장려하고 개발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그림책이나 만화책도 어른들이 더 많이 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어린이 청소년극은 아름다운 그림책보다 훨씬 더 강렬해요. 단순한 어린이 대상의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업이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극을 만들 때가 제일 어려워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어야 해서,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립니다." (2편에서 계속)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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