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정말 더럽게 안 써질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런 때다. 생성형 인공지능, 그러니까 AI인 챗지피티에 물었다. “지금 보낸 링크가 지금까지 내가 〈에스콰이어〉에 연재한 글이야. 이걸 토대로 내 문체를 살려서 영화 〈중간계〉와 AI 영화의 미래에 대한 글을 써봐.” 1분 만에 글이 완성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이 완성됐다. 대학교 신입생 교양과목 리포트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샘 올트만은 몇 년 안에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AGI(인공일반지능)가 나올 거라는데, 투자를 더 빠르게 많이 받기 위한 뻥튀기가 아닌가 싶다. 이 따위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아직 좀 더 남았다는 소리다.
아직은 멀었다는 게 영원히 멀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마음으로 좀 더 미래를 생각해보자면 말이다. AI 진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진 않아도 인간 지능 진화 속도보다는 확연히 빠르다. 5년 전 AI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면 올해 AI는 크로마뇽인이다. AI 영상의 질적 진화를 생각해보시라. 5년 전만 해도 AI는 사람 손가락 숫자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나는 올해 중반까지만 해도 쇼츠로 뜨는 AI 영상을 진짜 영상과 구분할 수 있었다.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얼마 전 나는 페이스북에 고양이 관련 영상을 하나 올렸다가 황급히 내렸다. AI 영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AI 영상에 속았다. 내년부터는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AI가 사람을 완전히 속일 만큼 영상을 만들어내는 건 쇼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보다 긴 동영상을 만드는 건 아직 어렵다. 불가능하다. AI는 움직이는 대상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는 기술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다. 영상의 길이가 조금만 길어져도 모든 것이 뭉개진다. 영화가 AI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건 시기상조다. 시기상조라고 모두가 말할 때 뭔가를 해내는 사람들은 있다. 이를테면 제임스 캐머런 같은 사람이다. 그가 CG를 본격적으로 영화에 도입해 〈어비스〉(1989)와 〈터미네이터 2〉(1991)를 만들었던 시기를 모두가 기억한다. 지금 돌아보면 상당히 초보적인 CG였다. 움직이는 바닷물과 계속 형태를 변화시키는 액체 금속은 초보적인 CG로 창조하기 가장 수월한 대상이었다. 중요한 건 제임스 캐머런이 이걸 처음으로 해냈다는 사실이다. 아니다. 처음으로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영화의 역사가 바뀌지는 않는다. 캐머런은 처음으로 ‘잘’ 해냈다.
영화는 기술이 아니다. 예술이다. 기술적 예술이다. 새로운 기술적 장난감이 등장하면 그걸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구현해내야 한다. 이야기 속에 접합시켜야 한다.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누군가 한 번 그걸 해내면 가능성은 순식간에 확장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터미네이터 2〉가 개봉한 지 2년 뒤인 1993년 〈쥬라기 공원〉을 내놓았다. 극장에 앉아 있던 나는 브라키오사우르스가 처음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거의 숨이 멎었다. CG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AI 영화도 선구자가 필요하다. 제임스 캐머런,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기술을 예술로 만드는 천재적인 선구자가 필요하다. 나 같은 평론가 따위가 ‘그게 되겠어?’라고 방구석에 앉아 불평하는 동안 뭔가를 해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 글을 시작하며 나는 챗지피티에 〈중간계〉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용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글이긴 하지만 몇몇 대목을 한번 인용해보자. “너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이다. 창작자들이 AI를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한 수많은 〈중간계〉 관련 기사가 비슷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요즘 기자들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사를 쓴다. 그래서 다 비슷비슷해지고는 있다만, 비난할 생각은 없다. 〈중간계〉 리뷰를 쓰며 공력을 다 쏟을 이유는 딱히 없을 것이다. 어차피 기자와 평론가는 AI 등장으로 가장 먼저 사라질 직업 중 하나로 거론된다. ‘국내 최초 AI 활용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개봉한 〈중간계〉는 이런 이야기다. 불법 도박 사이트로 돈을 제법 번 재범(양세종)이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귀국한다. 모두가 그를 노린다. 국정원 요원 장원(변요한), 서울청 외사과 팀장 민영(김강우), 배우 설아(방효린), 방송국 피디 석태(임형준) 등은 각자의 이유로 재범을 빼돌려야 한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조폭 보스인 물개(이무생)가 재범의 돈을 노리고 그를 납치해버린다. 모두가 차를 타고 납치범을 쫓던 와중에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눈을 떠보니 이승과 저승 사이 중간계다. 그들은 12지신 저승사자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에 사천왕이 나타나 그들을 돕는다. 염라대왕과 해태도 나온다. 하여간 다들 싸우기 시작한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영화는 ‘To be continued’라는 자막과 함께 끝나버린다. 뭐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다. 2편 시나리오도 나와 있다는데 그것도 딱히 중요하지는 않다. 모두가 기대했던 건 이 반쪽짜리 기획 영화가 AI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다. ‘국내 최초 AI 활용 장편영화’라면 적어도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범죄도시〉 강윤성 감독이 이 영화에 AI를 활용한 부분은 단 하나다. 특수효과다. 〈중간계〉는 크리처물이다. 12지신, 사천왕, 해태, 염라대왕 같은 크리처들이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어떤 액션을 보여주느냐가 가장 중요한 영화다. 놀랍게도 영화는 우리가 매일매일 쇼츠로 보는 AI 특수효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아니다. 넘어설 생각조차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크리처들은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끊임없이 형태가 바뀐다. 바뀌는 걸 의도하고 바꾼 게 아니다. AI가 아직 그걸 못해서다. AI가 만든 폭파 장면은 20년 전 한국영화 특수효과를 연상케 한다. 실사 인물들이 AI가 만든 크리처들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면도 거의 없다. 이 기술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는 컷을 끝없이 자잘하게 나눈다. 눈속임이라도 해야 하는 탓이다. 〈중간계〉는 개봉용 영화가 아니다. 테스트 스크리닝용 영상이다. 제작진이 이걸 통해 실험한 건 AI의 온전한 가능성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목적은 단 하나다. AI를 사용하면 얼마나 돈을 아낄 수 있을까. 이것뿐이다.
강윤성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VFX로 처리하면 폭파 장면 하나에 4~5일이 걸리는데 AI를 활용하니 한두 시간 만에 끝났다.” 나는 완성품과는 거리가 먼 1시간짜리 영상을 8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개봉시키는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기자회견 내내 제작진은 크리처 액션을 AI로 구현한 기술적 성취를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성취? 제작진은 AI를 오해하고 있다. 할리우드가 지금 AI를 근심하는 이유는 비싼 특수효과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라서가 아니다. 기획과 시나리오 단계부터 완성까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은 기술이라서다. 그러니 ‘국내 최초 AI 활용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은 오해다. 이건 ‘국내 최초 AI 특수효과 활용 장편영화’에 불과하다. 특수효과 수준은 오늘 SORA를 이용해 누군가 틱톡에 만들어 올린 영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AI는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어제 올린 영상보다 내일 올리는 영상은 확연히 나아질 것이다. 돈 받고 개봉하는 장편영화에 도입할 만한 기술이 아니라는 소리다.
강윤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AI는 철저한 도구일 뿐, 연출과 연기 같은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한슬 AI 연출 담당은 이렇게 말했다. “기술 발전 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지만, 그보다는 콘텐츠 본질의 스토리텔링과 연출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모두가 AI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AI는 CG의 발명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기술적 진화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진화다.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크리에이티브가 될 것이다. 할리우드가 가장 근심하는 이유다. AI의 진화는 더 값싸게 〈트랜스포머〉를 화면에 구현하는 재주 따위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아예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해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같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되고야 말 것이다.
2035년쯤, 나는 이런 프롬프트를 챗지피티에 쳐 넣을 것이다. “필립 K.딕의 SF 소설 〈유빅〉을 원작으로 한 오드리 헵번과 브래드 피트 주연의 크리스토퍼 놀런 연출 영화를 2시간 30분짜리로 만들어서 보여줘.” 영화산업은 이미 2032년쯤 망했다. 극장은 사라졌다. 친구가 영상을 하나 보내며 흥분한다. “내가 장 뤼크 고다르 최고 걸작을 만들었어.” 나는 불평한다. “됐어. 죽은 고다르 불알은 그만 좀 만지고 싶다.” 가만 생각해보니 〈중간계〉가 좀 더 낫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컸다. AI로 특수효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를 썼어야 했다. 그거야말로 ‘국내 최초 AI 활용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에 더 어울렸을 것이다. 영화도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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