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묘정 칼럼] 한국의 정체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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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묘정 칼럼] 한국의 정체성에 대하여

문화매거진 2025-11-30 23:00:01 신고

[문화매거진=노묘정 작가] 예전에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제목만 들으면 석굴암이나 다보탑에 대해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수업은 한 학기 동안 교수님과 함께 질의응답을 이어가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유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수업이었다. 그저 국가에서 지정해 놓은 문화재를 당연하게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유산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기말고사 때 에세이로 제출하는 수업이었다.

아무래도 졸업한 지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내가 그때 뭐라고 써놓았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솔직히 안 기억하고 싶다…) 요즘 들어서는 그 수업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적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내 작품에 내 나라만의 특성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한국 애니메이션만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어버버하면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국 애니메이션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특징은 사실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잘 모른다. 어쩌면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오히려 해외에 나갔을 때나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더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마치 연인을 만났을 때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비교군이 있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와 내 나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게 된달까?

▲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민하고 빠르다 / 사진: e스쿨존 제공
▲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민하고 빠르다 / 사진: e스쿨존 제공


특히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관찰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기민하고 빠르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어떻게든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언제나 두리번두리번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빠릿빠릿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 공항처럼 짐 검사를 하는데, 줄 서 있을 때부터 코트 벗고 가방 안에서 위험한 거 다 꺼내 놓고 들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 사람들이다. (나도 그랬다.) 유럽 사람들은 검시관과 담소도 나누고 스카프부터 모든 것을 천천히 벗으면서 여유롭게 움직이는데, 우리는 그렇게 급할 것도 없으면서 언제나 달리기 전 스타트 자세를 취하는 사람처럼 긴장을 하고 사는 것 같다.

매년 엄청난 인재들은 쏟아지지만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모든 인프라가 서울에 몰려 있지만 서울에서 거주하기는 쉽지 않다. 해내야 하는 일들은 참 많지만 그중에 내 마음이 가는 일은 딱히 없고, 그런 일까지 하려면 아주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또 번아웃은 오면 안 된다. 아마 요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분위기이지 않을까 싶다.

▲ 드라마 '안나' 스틸컷 / 사진: 쿠팡플레이 제공
▲ 드라마 '안나' 스틸컷 / 사진: 쿠팡플레이 제공


“열심히 살면 그만큼 보답받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게으르면 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고.”

‘안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중 가장 내 마음을 울렸던 대사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들이 공감할 만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너무나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열심히’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우리는 정말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게으르게 살면 안 된다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것일까. 남들도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그런 강박의 끝이 허무함일까 봐 걱정된다.

지금 이 시간이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진다면, ‘갓생’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까 싶다. ‘갓생’의 뜻을 검색해 보니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는 삶,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열심히 사는 삶이라고 한다. 갓생러들처럼 불안감을 뭐라도 하면서 희망차고 긍정적이게 보내려고 하는 것도 너무 좋은 태도이지만, 때로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강해서 불안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이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그들이 갓생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또 움츠려드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죄책감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지는 않을지 그게 너무 걱정이다. 그렇지만 난 정말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도태되지 않고 지금도 이렇게 방구석에서 글을 쓰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경쟁 사회에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문화권마다 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다수가 자기계발에 미쳐 있는 나라도 많이 없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취업할 것도 아닌데 토익 학원에 가고, 운동하려고 바디프로필을 등록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은 이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 안에 내가 포함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나는 바디프로필은 정말 죽어도 준비하기 싫다.) 그렇지만 문화유산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불안감이 밀려올 때는 방 안에 누워 있어도 괜찮고, 조금 많이 먹어도 게으르고 나쁜 게 아니라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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