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유정 작가] 화실이 정리되면서 한두 팀씩 초대를 시작했다. 고마운 이들과 연말연초를 나고 싶은 욕심일 게다. 엊그제 맞이한 이들 또한 어설픈 전시를 함께 시작했던 동료들이었다. 순수하게 만났고 여전히 순수하게 사는 이야기를 한다. 이것저것, 흐들거리는 나뭇잎에 묻은 바람같은 선선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는 결국 그림 그리는 이야기로 돌아온다.
- 그림을 안 그린지 반년이 넘었어요. 이래도 될까요.
저도 그래요. 특히 요즘에는 개인전 끝나면 반년이고 몇개월이고 붓을 잡지 않아요. 늘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나 늘 그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나태한가, 이 일을 할 자격이 안 되는가 회의감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타인의 템포잖아요.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눈앞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저 컬러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지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처음에 힘을 주고 있던 태도와는 달리 ‘항상 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 작가님은 전시 소식이 계속 있어요. 대단해요.
글쎄요. 모아놨던 작업이미지를 천천히 나눠서 올리는 것도 있어요. 저를 잊지 말라고요. 그게 통했군요. 한편으론 살아가는 방법으로 택한게 이거라 멈출 수 없어요. 이것저것 ‘잘 숨쉬기 위해’ 시작하고 그만둔 것들이 수두룩한데, 글을 쓰고 이미지를 조합하는 이 행위가 저의 무언가를 충족시켜 주더라고요. 그런 것 뿐이라, 대단하다는 말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 사람은 그만둘리 없다는 공백’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그 노력만큼은 저도 스스로에게 계속 인지시키는 부분이라,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나와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별도의 경제활동을 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림을 위한 직장생활에 지쳐서 전시를 마련하는 일에 소홀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불분명한 죄책감을 가지곤 한다. 이번 대화도 그에 연장선인 부분이 있어 다시 되짚어 보았다.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서 생기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지금의 삶이 그림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길 필요로 한다. 괜찮다고, 나도 그렇다고, 이 템포로 살아가는 것이 틀린 게 아니라고. 귀로 듣는 그 말들 속에는 위로보다 더 깊은 어떤 연대가 있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기 위해’ 잠시 쉼을 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책감은 사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다’는 마음의 증거임을 말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여금 우리는 결국 각자의 속도를 찾을 것이다. 내 템포는 무엇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일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고민하며 동행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를 부끄러워하거나 비교할 필요도 없는 각자의 영역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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