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엔 얼음도 귀해 산 조개를 그냥 싣고 와 절반은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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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엔 얼음도 귀해 산 조개를 그냥 싣고 와 절반은 버려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11-30 08:00:53 신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동해에서 채취한 조개를 서해의 남포항까지 운송해야 했기 때문에 폐사율은 50%가 넘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도착한 것만도 다행이고 이번 일로 앞으로는 북한의 도로등 인프라 상황을 고려해서 주문을 미리 넣어야 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우리나라 수준과 비슷하다 착각하고 3~4시간이면 동해에서 서해로 올 것으로 기대했던 거였다. 또 하나는 인천에 가면 해수 얼음이나 해수를 싼값에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처럼 북에서도 어디서나 손쉽게 얼음을 구할 거라 여겼는데 그게 북한 상황을 너무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전에 컨테이너에 얼음을 안 넣고 생물조개를 보내는 바람에 항상 20~30%는 폐사가 나서 몇 번을 강하게 항의도 했는데, 사실 북한에는 그런 시설이 전혀 없다는 걸 내가 몰랐다.

 아마 있었어도 전기사정으로 가동을 못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한번은 화물 중간중간에 수박 크기만 한 얼음덩어리를 넣어 보냈길래 이게 뭔가 했더니 그 얼음덩어리는 석빙고 같은 자연 냉장고에서 꺼내 온 거란 얘기를 듣고는 그 고마운 성의는 알겠어도 고개는 하늘을 보게 했다.

 그에 앞서 내가 수산물 거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내 모습을 실감했는데 조개 등 수산물을 옮기는 데 드라이 컨테이너가 아니라 냉장컨테이너를 쓴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점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동해조개를 서해로 가져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자 다른 업자들한테서도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같이 배로 사업하자는 제의도 들어 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동해로 발길을 옮겼다.

 동해에 와서 서로 처음엔 협업으로 중국배를 용선해서 북한의 흥남, 원산에 보내 속초항과 동해항으로 조개를 한번에 60여톤씩 들여 왔다. 안인에 있던 9천평 넓이의 태평양수족관에서 사나흘 걸려 생물조개 모래를 빼낸 뒤 선별하여 식용으로 곧바로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전국으로 배송했다.

그러나 수족관 사용료 주고, 송금하고 정산하고 나면 내 손에 떨어지는 건 겨우 차비 수준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활조개는 대량으로 들여와 원가를 낮춰야 하고 미수금도 깔아 놓아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금이 늘 달리다 보니 원가 싸움에서 남들과 경쟁이 되질 않아 나는 업계에서 매번 5등 밖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들여오는 조개의 선도나 조개품목구성(대략 9종류)에서 다소 경쟁력이 있어서 그나마 버틸 수가 있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며 수산업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나자금이 풀어진 일도 있다.

 다름 아닌 민현식 사장님이란 분인데 그와 인연은 200911월 말인가 북한에서 갑작스런 화페개혁으로 남북한 교역이 한동안 멈췄던적이 있었다. 남포인천간 다니던 국양해운도 운항을 중단 했었고 단동을 경우해서 들어오는 북한 물자도 멈추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북한에서 무슨일이 벌어졌구나만 짐작만했지 누구도 앞일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모두들 답답해하고 있을 때 였다. 나중에 들으니 북한신권과 달러환전 비율을 조정할때여서 그랬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답답한 시기에 심양에 있는 동포직원이 중국배가 해주항에 서있는데 그배에 내 조개을 실어 보내면 어떻겠냐는 묻는 거였다.나는 반대 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는 조개의 수요도 딸리고 앞으로 물건 반입이 언제 재개 될지 기약도 없고 할 때라서 나는 좋다고 했다.

중국배을 임대한 선주는 인천의 크라운회사라는것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인천에서 크라운 선주을 찾아보고 만나분이 민현식사장님 이었다. 이후 민사장님을 만나서 해주에 정박중인 배에다 크라운 조개와 내 조개을 실고 오기로 하고 kg당 운임을 정하고는 배를 출항 시켰다.그런데 인천으로 들어온 배에는 내 물건만 실어오고 정작 크라운 물건은 못실고 내려온 것이다.여기에서 사단이 낳다. 민사장님이 자기 물건은 못실었으니 운임비를 더 내라는 거였다. 나는 약속한대로 주겠다고하며 실랑이을 한참 벌였고 나중에 서로 양보해서 타협을 보았다.이때 민사장님의 10원짜리 하나에도 철저하다는 것을 배우면서도 다시는 만날이 없다고 그때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인천 사무실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애로사항을 말하게 됐는데,“내일 부인과 같이 오면 매회 최대 1억원을 빌려주겠소라는 생각지도 않은 말씀을 하셨다. 난 그동안 민사장님을 속으로는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냥 전화로만 가끔 안부만 묻던 사이라 그날도 인사차 점심이나 먹으러 들렀던 건데 너무나 뜻밖의 큰 호의를 입은 게 지금도 얼떨떨하다.

아무튼 다음날 집사람과 인천에 가서 민사장님 시키는 대로 공증도 하고 돈을 빌렸고 그 뒤로도 급할 때 연락하면 스스럼없이 자금을 융통해 주셨다. 세상에 담보도 없이 그렇게 큰돈을 빌려주신 게 나한테는 천복이었다.  10년 넘게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해보니 민사장님의 그 감사함과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단돈 백만원 꾸기도 얼마나 어려운 세상 아닌가,

 그러고 보니 또 한 분 더 생각이 난다. 99년 홈쇼핑에서 매트가 너무 잘 팔려 MD에게 방송중지 요청까지 할 때였다. 어느날 임가공 업체 사장님이 비슷한 종류의 메트를 만들어 놓고 못 파는 분이 계시니 내가 좀 팔아달라는 거였다. 나는 그 제품을 손봐서 열흘만에 5천장을 팔아 드렸다. 그러고 나서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 매트를 제조한 당사자가 감사의 표시로 점심을 낸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직원을 데리고 한여름 비오는 날에 생태탕을 그분과 먹었는데, 그날 대화가 일반적인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아니라 환단고기, 바이칼호 등 잘 알지도 못하고 듣기도 지루한 상고사. 우리 단군선조가 주제였다.

 같이 데리고 간 직원은 오죽하면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런데 며칠후에 자기 사무실로 오라 해서 갔는데, 뭐 어려운 일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사업자금이 늘 모자라죠했더니 그분께서 주저없이 큰돈을 꿔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 몇 없는 부품, 소재 만드는 회사의 회장님이셨다. 중간에 계산해 보니 오고간 자금의 액수가 대략 몇십억은 넘었던 것 같다. 난 숫자에 그때나 지금이나 좀 약한 편인데, 어느날 회장님 왜 저한테 이리 큰돈을 꿔 주세요?”라고 물어봤더니 회장님의 일화를 소개해 주셨다.

 6·.25 직후 회사가 어려워 명동에 사채를 얻으러 갔는데 사채업자가 점심때까지 물 한 모금 안 주고 기다리게 하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더란다. 중국집 가서 회장님이 짜장면을 맛있게 아주 잘 먹는 것을 보고는 그 사채업자가 같이 돈 꾸러 온 사람들 중에 회장님한테만 담보도 안 잡고 이자도 제일 싸게 빌려주셨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는 사채업자가 회장님 먹는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은 내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다란 판단을 하고 그런 혜택을 줬다고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사실 그때 배도 고팠지하시며 웃으셨던 기억도 난다. 결론은 나도 생태탕을 맛있게 잘 먹어서 그런 행운이 왔던 거였다. 참 웃기는 일이지만 사실 음식은 맛있게 먹고 볼 일이다 싶다. 잠깐 얘기가 딴 데로 샜다.

북한에서 온 조개를 선별하는 작업
북한에서 온 조개를 선별하는 작업
북한에서 온 조개 
북한에서 온 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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