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한 해의 끝자락, 음악은 계절의 순환을 악보 위에 꿰맨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이 12월 12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여는 제521회 정기연주회 ‘겨울, 다시 봄’은 그 꿰맨 자국을 관객의 가슴에 섬세하게 드러내는 자리다. 무대는 바깥의 찬바람과 반대로 실내의 따뜻한 불빛 아래서 시작되지만, 곧 음표 하나하나가 계절의 표정을 불러낸다.
1부의 문을 여는 것은 바로크의 정수,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전곡이다. 1725년 출간된 바이올린 협주곡 모음집 ‘화성과 창의 시도’에 실린 네 개의 콘체르토는 각각 봄·여름·가을·겨울을 한 편의 소네트와 선율로 구현한 표제음악의 선구자다. 이날 무대에서는 독주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가 맞붙는 명료한 대화가 바로크 특유의 생동감을 불러낸다.
첫 악장인 ‘봄’은 새소리와 물결의 속삭임이 어우러진다. 경쾌한 리듬 속에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 포착되고, 목동의 평온한 꿈은 햇살로 번지는 듯 무대를 채운다. 이어지는 ‘여름’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 폭염의 무거운 공기와 폭풍우의 날카로움이 트레몰로와 불협화음으로 폭발하며 청중의 숨을 조인다.
‘가을’은 풍요와 향연의 결을 춤으로 풀어내고, 수확 뒤 찾아오는 고요함까지 현의 유려한 선율에 실어 보낸다. 마지막 ‘겨울’은 얼음 같은 스타카토와 떨림으로 혹한을 체감하게 한다. 벽난로의 온기와 바깥의 칼바람이 교차하는 대비는 이 작품이 담은 계절의 다층적 감각을 선명히 보여준다.
협연자로 무대를 이끄는 바이올리니스트 한경진은 예원·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독일 베를린·라이프치히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친 연주자다. 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 등 국내 유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경험, 그리고 브라디미르 아슈케나지로부터 받았던 ‘매혹적인 소리’라는 평은 그의 음악이 지닌 깊이와 매력을 방증한다.
현재 경북대 교수이자 KCO 악장, DCH 비르투오소 챔버 리더로서 무대와 교육 현장을 오가는 그의 연주는 비발디의 계절을 보다 인간적이고 섬세한 호흡으로 재해석할 것으로 기대된다.
2부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으로 이어진다. 26세 청년의 손에서 나온 이 작품은 러시아 민속 선율과 낭만적 서정이 어우러진 초기 교향곡의 걸작이다. 당시 스승 루빈시테인의 혹평을 견뎌내고 완성한 이 곡은, 표면의 서정 뒤에 숨은 청년 작곡가의 내면적 성장을 들려준다.
전형적으로 4악장 구조를 취한 이 작품은 악장마다 계절과 감정의 층위를 다르게 쌓아 올린다. 1악장 ‘겨울 여행의 꿈들’은 눈 덮인 설원을 걷는 듯한 몽환성을 목관과 현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펼치고, 2악장 ‘황량한 땅, 안개 낀 대지’는 관악과 현의 서늘한 대화 속에서 은근한 슬픔을 드러낸다. 3악장에서는 러시아 민속무용의 경쾌함이 스케르초로 변주되며 잠깐의 활력을 주고, 마지막 4악장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장대한 종결로 겨울 뒤에 도래할 봄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지휘봉을 잡는 백진현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는 이번 프로그램을 “비발디의 ‘사계’가 자연과 사람의 교감을 외부로 펼쳐 보인다면, 차이콥스키의 ‘겨울날의 환상’은 그 감정을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작품”이라고 정리했다. 서로 닮지 않은 두 작품이 같은 무대에서 만나는 이유는 단 하나, 계절의 순환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하는 음악적 성찰이다.
관객은 이날 공연에서 단순한 감상의 즐거움을 넘어 계절이 남긴 자국을 음악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겨울의 차가움과 봄의 미소가 한 밤에 뒤섞이는 그 순간, 악보는 다시금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연말의 한 페이지를 켜켜이 채울 이번 무대는 올해 대구시향의 마지막 정기공연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계절과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공연은 더할 나위 없는 초대장이 될 것이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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