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K-드라마·K-푸드가 세계를 흔드는 동안, 정작 ‘빛을 다루는 산업’인 주얼리는 왜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까. 한국 주얼리 시장은 명품을 독점한 해외 브랜드와 돌반지·커플링 등 생활용을 지탱하는 영세 브랜드로 극단적으로 갈려 있다. 디자인·유통 혁신도, 투명한 제도 개선도 더디기만 한 현실은 수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관련 법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기획은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 보석감정원, 업계 전문가 등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한국 주얼리 산업의 현주소와 한계를 짚어본다.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K-주얼리’가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할지, 제도와 시장, 디자인까지 총체적 해법을 모색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K-컬처의 다음 빛나는 이름이 ‘K-주얼리’가 되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산업과 정책, 소비가 함께 움직여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주]
한 사람의 존재를 빛내는 주얼리. 화려한 디자인과 정밀한 세공으로 작지만 강한 힘을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부의 상징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약속하는 증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뒷골목에서는 영수증 없는 금이 오가고 표준 없는 감정서 한 장에 수백만원이 오르내린다. 세계가 K-산업에 열광하는 시대, 그 이면에는 30년째 제도적 공백 속에 외면받아 온 K-주얼리가 있다.
국내 패션 산업은 수출과 디자인 경쟁력을 기반으로 이미 확고한 산업적 위상을 갖췄다. 트렌드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패션시장 규모는 2023년 48조4000억원에서 2024년 49조6000억원, 올해 50조8000억원으로 추산되며 3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주얼리 산업은 제도 기반 부재로 성장의 발판을 잃은 상태다.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월곡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국내 주얼리 시장은 약 8조7732억원으로 추산되지만 업계는 실제 규모가 2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공식 통계와 현장 체감의 큰 괴리는 '왜 주얼리 산업만 유독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운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이 같은 불균형은 주얼리 산업이 제도적 기반 없이 방치돼 온 현실을 보여준다. 주얼리 산업이 음성화의 길로 접어든 출발점은 1994년 '고물영업법' 폐지다. 이 법은 귀금속·보석류뿐 아니라 각종 중고품·고철·잡화류까지 포괄적으로 관리하며 금과 은 등을 '고물 거래'로 분류해 감시·단속 대상에 두던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 경제 구조 개편 과정에서 금·보석 소비가 급증하자 정부는 해당 법을 폐지하고 관련 조항을 귀금속관리법, 소비자보호법, 부가가치세법 등으로 분산했다. 산업 규제를 규제 중심(negative)에서 권장 중심(positive)으로 전환해 시장 자율성을 높이려는 취지였지만 고가 원자재를 다루는 산업 특성상 함량·순도·감정 등 최소한의 소비자 보호 장치까지 사라지며 오히려 음성 거래와 소비자 피해를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법 폐지 이후 금·보석 원자재 시장은 빠르게 음성화됐다. 세금 탈루와 무자료 거래, 비표준 감정 등 음성적 관행은 남고 인력 양성과 표준 인증 등 유통 투명화를 구축할 제도적 틀은 부재했다. 규제만 사라지고 육성 체계가 비어 있는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주얼리 산업은 사실상 '빈껍데기'로 전락했다.
온현성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 연구소장은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시장 음성화에 대해 "당시 주얼리 업계는 개별소비세법 적용으로 일반 세법보다 규제 강도가 높아 세금 부담이 컸다"며 "부담이 커지니 시장이 숨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수입, 수출, 세제 등 모든 영역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못해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결과 주얼리 산업은 제조·세공·감정·디자인 등 핵심 밸류체인이 불안정해졌고 전문 인력 양성 체계도 자리 잡지 못했다. 무자료·현금 거래와 자격 없는 판매, 감정 오류 등 비표준 유통 구조는 산업 신뢰 하락으로 이어졌다.
국내 주얼리 산업의 제도 공백은 귀금속과 다이아몬드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한국은 세계 7위 금 거래 규모를 갖고 있지만 고부가가치 브랜드는 부족하고 코스피 상장 기업도 단 한 곳뿐이다. 월곡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귀금속·보석 관련 사업체는 1만6298개이며 이 중 98.5%가 10인 미만, 88.6%가 개인사업체다.
개인·가족 단위 운영이 주류인 사업체를 흔히 '영세 사업장'으로 분류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온 연구소장은 "주얼리 업종에서는 연매출 1억원 이하로 신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매출이 적어서가 아니라 신고되지 않은 매출 비중이 크기 때문"이라며 "금 한 돈 가격이 70~80만원인 상황에서 월 매출이 800만원도 안 된다면 점포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 '영세'라는 표현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적 감시가 미비한 소규모 사업장 문제는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근무 환경을 초래했다. 평균 5인 미만 사업장인 주얼리 업계는 4대 보험 가입 의무가 있음에도 고용보험 미가입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신용카드 발급이나 대출, 산업재해 신청 등에서 불이익이 발생하고 있다. 금속노조 조사에 따르면 주얼리 사업장의 고용보험 미가입률은 올해 7월 기준 약 70%에 달했다.
귀금속 상권의 중심지인 종로 일대에서는 탈세 문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금지금 면세제도, 의제매입세액 공제제도 등을 도입해 대응에 나섰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금·보석류는 적은 양으로도 고가 거래가 가능하고 재고 추적이 어려워 세무당국이 관리하기 까다로운 업종으로 꼽힌다.
업계는 뒷금 등 음성 거래가 장기간 이어진 핵심 원인으로 금·보석류 세제 구조를 지적한다. 금은 화폐적 기능을 가진 원자재이며 소멸하지 않고 순환한다. 부가가치세는 소비 과정에서 '소멸하는 재화'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금 거래에 반복적으로 부가세가 매겨지면서 거래가 투명해질수록 세금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예컨대 소비자가 100만원짜리 금을 사면 10만원의 부가세를 내지만 되팔 때는 이를 돌려받지 못한다. 동일한 금이 거래될 때마다 부가세가 반복 부과돼 거래를 투명하게 할수록 부담이 커지는 역설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같은 부가세 체계가 유지되는 한 시장 투명화는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다.
소규모 소공인은 회계·세무 인프라를 갖추기 어려운 데다 금·보석류는 단가가 높아 현금 거래 비중이 높다. 이 과정에서 무자료 거래와 현금영수증 미발급 관행이 뒤섞였고 일부 매장은 카드 결제를 받지 않아 매입·매출 추적이 불가능한 경우도 발생한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20~2024년 6월) 귀금속 소매업의 현금영수증 발급의무 위반 가산세·과태료 부과 건수는 2020년 1679건에서 지난해 3463건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다이아몬드 시장 역시 비표준 감정 관행으로 소비자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국내 감정서·감별서는 국제 기준과 달리 국가 표준이 없어 감정원마다 색·투명도·컷·광택 기준이 제각각이다. 같은 스톤에서도 등급 차이가 발생하는 일이 반복되고 재감정 시 등급이 낮게 나오는 사례가 잦아 소비자가 감정서를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 됐다.
국내 유통망에서 널리 쓰이는 '봉인 감정서'도 문제로 지적된다. 스톤을 플라스틱 케이스에 봉인한 뒤 감정서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겉보기에는 표준화된 거래처럼 보이지만 실물 검증이 어렵다. 이 때문에 유통 과정에서 등급 불일치, 오감정, 바꿔치기 가능성이 커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감정서를 위조해 금융기관 대출을 받거나 실제 등급보다 부풀려 고가에 판매하는 사례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조기선 국제보석감정원 원장은 "한국의 '봉인 감정서'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적 결함을 가진 시스템"이라며 "비봉인 감정서 체계는 감정서 위조나 스톤 바꿔치기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오히려 시장 투명성을 높인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감정 체계 역시 국제 기준에 맞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 제기 끝에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주얼리산업의 기반조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실태조사, 전문 인력 양성, 우수 브랜드 지정 등 경쟁력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 기반을 마련하려는 취지다.
곽 의원에 따르면 20대 국회 때부터 주얼리 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유통을 관리하는 내용의 법률안들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논의만 이어져 왔을 뿐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통과되지 못하고 큰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지난 5월 곽 의원은 종로 주얼리 타운에서 소상공인들과 현장 간담회를 갖고 의견 청취와 금 부가세 등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당시 곽 의원은 "주얼리 산업은 종로의 상징적인 소상공인 기반 산업이자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일 잠재력이 큰 분야"라며 "중국, 인도, 태국,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가 주얼리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종로구 주얼리 소상공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라며 "국민의 삶을 제대로 보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곽상언 의원실 관계자는 본지에 "법안이 아직 통과 전 단계로 내부적으로 보완할 부분이 남아 있다"며 "12월 중순경 정리가 마무리되면 구체적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국내 주얼리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공 기술과 디자인 역량을 갖춘 만큼 법안이 통과될 경우 수출 확대와 기술·제조·디자인 교육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국가 차원의 지원 기반이 마련되면 산업 발전 속도도 한층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해외 럭셔리 브랜드 공세 속에서 K-주얼리가 글로벌 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내부 경쟁력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내 시장에서는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쇼메, 반클리프 등 주요 글로벌 브랜드가 중산층 이상 소비자의 30% 이상을 이미 확보한 상황이다.
해외 브랜드는 유럽 왕실 주얼리 등 오랜 역사와 브랜드 가치를 뒷받침할 헤리티지를 갖고 있는 반면 국내 주얼리 브랜드는 스토리텔링과 헤리티지 구축 능력에서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 브랜드를 단순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감성과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K-팝 등 문화 산업과의 연계, 소셜 미디어 마케팅 강화,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내러티브 구축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온 연구소장은 "K-팝 등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은 문화 콘텐츠와 연계하거나 AI 기반 디자인·제품 개발을 통해 젊은 세대와 접점을 넓힐 수 있다"며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마케팅 투자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제·제도 개선과 함께 K-주얼리만의 차별화된 브랜딩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어 "업계와 정부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만큼 법안 논의가 조속히 진전되길 기대한다"며 "다양한 기술과 시도가 더해져 K-주얼리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시리즈 예고
본 기획은 3회에 걸쳐 한국 주얼리 산업의 구조적 문제와 개선 과제를 짚는다.
①편: 해외 명품 ‘훨훨’ vs 국산은 ‘위축’···양극화 늪에 빠진 K-주얼리
②편: K-주얼리, 빛을 잃은 산업···법·제도 없는 무방비 시장
③편: K-주얼리 르네상스를 위하여···글로벌 경쟁력 회복 위한 해법은?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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