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1세로 별세한 국민 배우 '이순재'/출처 : 게티이미지
한국 TV가 태어난 순간부터, 가족극의 전성기, 시대극의 품격, 그리고 국민 할아버지의 시대까지. 이순재의 긴 커리어를 네 개의 장면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1. 청년 이순재, TV라는 신대륙의 첫 얼굴
」1950년대 후반, 한국에서 TV는 아직 낯선 매체였는데요. 방송 장비는 불안정했고, 대부분의 콘텐츠는 생방송이었죠. 그 혼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이순재는 첫 주연급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그는 연극과 성우 활동을 병행하며 정확한 발성과 호흡을 갖춘 몇 안 되는 젊은 배우였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1957년 브라운관 드라마 출연으로 이어졌고, 당시 TV 관계자들은 그를 “새 매체에 가장 먼저 적응한 배우”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는 KBS의 초기 TV 드라마 중 하나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참여했는데요. 당시 TV 드라마는 편집 없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배우들은 긴 대사를 한 번에 외워야만 했었죠. 카메라 위치에 맞춘 동선과 타이밍도 현장에서 즉석으로 맞춰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이순재는 정확한 호흡과 발성을 기반으로 이러한 환경에 가장 먼저 대응한 배우였습니다. 당시 제작진들은 이순재의 대사 전달력을 새로운 기준으로 삼았고, 시청자들은 그를 통해 TV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경험했습니다. 청년 이순재의 필모그래피는 작품 목록이 아니라, 한국 TV 드라마가 어떤 목소리와 어떤 리듬으로 시작됐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아버지 이순재, 1990년대 한국 아버지상
」1990년대는 한국 가족극의 황금기였습니다. 주말 저녁이면 가족들이 TV 앞에 모였고, 각 가정의 갈등과 화해가 드라마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이순재가 있었죠. 첫 번째 전환점은 〈사랑이 뭐길래〉인데요. 작품에서 그는 ‘대발이 아버지’로 불리며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고집스럽고 다혈질이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가장의 모습은 당시 한국 사회의 전형을 그대로 반영했죠. 시청률은 65%를 넘겼고, 드라마 속 대사와 장면들은 국민적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순재가 그린 아버지상은 한국 가정이 가진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담은 아이콘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환점은 〈목욕탕집 남자들〉입니다. 그는 더욱 입체적인 아버지로 변했는데요. 다혈질의 성격, 상황을 해결하려는 책임감,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면모까지. 강부자와의 호흡은 국민 부부라는 별명을 만들었고, 드라마는 지금까지도 가족극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 작품은 이순재를 한국 가족극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연기를 통해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진 정서적 무게를 시청자에게 직접 전달했고, 90년대 주말극 속에는 언제나 이순재의 목소리와 존재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3. 스승 이순재, 시대극의 품격을 세우다
」1999년부터 방영된 〈허준〉에서 이순재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연기했습니다. 유의태는 냉정하고 단호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과 의술의 철학을 가진 스승이었습니다. 이순재의 절제된 표현과 단단한 발성은 캐릭터를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었죠. 현실에서도 그는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활동하며 수많은 후배 배우를 배출했습니다. 학생들은 이순재를 “원칙을 명확히 제시하는 스승”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연기 철학은 강의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드라마 속 스승 역할과 실제 삶에서의 스승 역할이 겹치면서, 이순재는 점차 ‘스승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의 연기는 시대극이 품어야 할 태도와 무게감을 보여주는 교본이 되었고, 유의태 캐릭터는 오늘날까지도 사극 속 스승 인물의 대표적인 모델로 남아 있습니다.
4. 할아버지 이순재, 국민을 웃기고 울린 이야기꾼
」2006년 〈거침없이 하이킥〉은 이순재의 또 다른 전성기였습니다. ‘순재 할아버지’라는 캐릭터는 짜증과 유머, 권위와 허당스러움을 모두 갖고 있는데요. 뜻밖의 허세, 버럭 화내는 장면, 그리고 가끔 드러나는 따뜻함은 시트콤의 정체성을 강화했고, 젊은 시청자들까지 그의 연기를 다시 발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순재는 노년의 배우가 가진 가능성을 완전히 새롭게 증명했습니다. 연령대가 높아졌지만, 역할의 폭은 오히려 넓어졌죠. 예능 〈꽃보다 할배〉는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 프로그램입니다. 여행지에서 드러나는 솔직한 성격, 동년배들과의 유쾌한 케미스트리, 때로는 꼬장꼬장하고 때로는 장난스러운 모습까지. 세대 간의 거리감을 자연스럽게 지웠고, 이순재는 예능 속에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증명했습니다. 무대 공연에서는 〈앙리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같은 대사량이 많은 작품을 통해 여전히 현역 배우임을 보여줬고,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긴 대사를 정확하게 소화하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와 관객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순재는 단순한 노인 캐릭터를 넘어, 나이가 들어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연기에 담았습니다. 그는 거칠고, 유머 있고, 때로는 허무하고, 마지막에는 다정한 노년의 얼굴을 보여준 배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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