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강산 작가] “오늘 한 여성을 그렸습니다. 거창한 무언가를 한 것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화가일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단지 사실을 작품에 담을 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이 작품에 담길 수 있겠지만, 그 부분은 정말 조심하고 싶습니다. 제 작품을 판매하려면 저의 시선이나 제 주장 따위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작품을 사시는 분들은, 그분들의 의견이 그림에 담기길 바랄 것입니다. 따라서 제 의견이 그림에 담기면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고집스럽게도 화가들은 자신의 의견을 그림 곳곳에 숨겨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요. 드러낼 수는 없지만. 이 그림을 보고 후대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길 내심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이지?’라고 고민하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의 성을 파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분위기입니다. 주제 넘을지 모르겠지만 여성들이 자신의 성을 파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장면을 제가 실제로 보았고, 따라서 그러한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오늘은 모델들과 제 작업실에서 만나기로 한 날입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이 조금 삐걱거리며 열렸고, 드레스 자락이 의자 다리에 스칠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내가 미리 요청한 그 드레스를 입고 왔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집중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이렇게라도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붙잡아두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말이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수줍은 것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문을 열까 하다가도, 괜히 물어봐서 그녀의 마음을 방해할까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실 대화를 잘 이끌지 못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모델에게 왜 그 일을 하느냐고 묻고, 또 어떤 이들은 위로랍시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는데, 나는 그런 걸 도저히 해낼 자신이 없었더랍니다. 그냥 조용히, 그녀의 숨소리와 드레스가 흔들리는 모양을 바라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늘은 드레스의 광택이 유난히 잘 보였습니다. 그녀가 꾸며 입고 온 저 드레스를 조금 더 예쁘게 표현하고 싶네요. 그녀에게 뒤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 역시 안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이 있고, 아마 그녀는 오늘도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지만 나는 굳이 그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녀의 표정을 상상으로 만들어 붙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저 그 존재의 윤곽만 그릴 뿐이지요.
남자에게는 외투를 벗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로 의자에 앉아 은화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그런 모습을 연출하도록 했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모든 긴장과 침묵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그 순간을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이 여성은 오늘 모델료를 받기 위해 잠시 이곳에 있지만, 그녀가 이곳까지 오기 전에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방 안에서 서 있는지, 오늘 밤의 마지막 대화를 누구와 나누게 될지. 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그 부분들 때문에, 그녀를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화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보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조용한 강인함을 가진 이들이 바로 이 여인들임을 느끼는 이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그녀의 드레스 아래 생긴 작은 주름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 주름 하나에도 그녀의 피로와 무게, 그리고 잠시 버티고 있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누가 대신 이야기해 줄 수도 없는, 그저 묵묵히 드레스와 몸짓, 침묵 속에 스며 있는 마음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마음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군가가 본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그녀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겠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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