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IS EDIT
“첫 번째 정상적인 에디션”이라고 평가 받은 아트 바젤 파리 2025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바젤 입문자와 바젤 숙련자, 두 가지의 시선으로 포착한 파리의 예술 풍경들.
첫 아트 바젤 파리에서 지도 없이 관광하기
2025년 아트 바젤 파리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 앞서, 내가 살면서 경험해본 아트페어는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아트부산이 전부임을 밝힌다. 아트 바젤 파리 VIP 세션을 오픈한 10월 22일, 낮 동안 각종 위성 전시들을 둘러본 뒤 오후 5시 무렵 페어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다면 입구에서 배포하는 종이 지도를 펼쳐 들고 대략적인 동선을 짜 궁금한 갤러리부터 향했겠지만 이곳은 파리의 그랑 팔레다. 일단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페어장을 구경하고 싶었다. 철저히 감상 대상으로 작품을 인식하는 나와 달리, 이 대단한 작품들을 어쩌면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보고 있을 컬렉터들의 표정과 태도, 부스 한 귀퉁이에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버려두고 컬렉터와 대화 중인 갤러리스트들, 샴페인 잔을 쥐고는 있지만 원고를 써야 해 복도 바닥에 철퍼덕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는 나와 같은 기자 무리, 열심히 인증샷을 남기는 인플루언서들도 종종 보였다.
41개국 206개의 갤러리가 참여했다는 이번 페어에서 다녀온 지 3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을 남긴 부스가 몇 있다. 가장 먼저 타데우스 로팍. 내가 방문한 10월 22일은 정확히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해 출품한 전이 유약 작품 〈Able Was I Ere I Saw Elba〉는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도 대단해 보였다. 파리에 온 첫날 봤던 멘데스 우드 디엠의 프레셔스 오코요몬(Precious Okoyomon) 개인전은 그날 봤던 가장 재미있는 전시 중 하나였다. 이튿날 페어장의 멘데스 우드 디엠 부스에서 공중에 매달린 오코요몬의 조각을 마주쳤을 때, 타지에서 지인이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이곳이 고가의 거래가 오가는, 철저히 상업적인 공간임을 잊게 하는 천진한 테디베어들은 갤러리에서 본 것보다 더 귀여워 보였다. 페이스 갤러리, 페로탕, 에바 프레젠후버, 화이트 큐브…. 세계 유수의 갤러리 부스를 차례로 지나오다 국제갤러리 부스가 시야에 들어왔을 땐 기분이 묘했다. 중앙에는 양혜규의 2025년 신작 〈Tinkle Feelered Chalky〉가 걸려 있었고, 대담한 색채를 쓴 김윤신의 회화 〈Song of My Soul 2006-145〉와 최재은의 〈When We First Met〉도 보였다. 작년도 올해도 아트 바젤 파리에 유일하게 참가한 한국 갤러리에서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웅장해진다. 타데우스 로팍에서 이강소의 조각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신진 갤러리와 젊은 작가들을 조명하는 에메르장스(Emergence) 섹션과 독창적인 기획전을 구성한 프리미에(Premiere) 섹션을 지날 땐 괜히 숨을 한번 골랐다.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배경 지식 없이도 내 눈높이에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거나, 황당하고 특이해서 단박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에만 시간을 쓰기로 했다. 쾰른 갤러리 드라이(DREI)의 부스는 정확히 그랬다. 연극 무대 뒤의 분장실을 옮겨다 놓은 듯, 조명 달린 거울과 테이블은 스쳐 지나갔다면 작품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지 헷갈려 머뭇거려야 했던 이 작품은 독일 출신 미라 만(Mira Mann) 작가의 〈Objects of the Wind〉였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갤러리와 작품들이 많았다는 이유만으로 아트 바젤 파리의 흥행과 완성도를 논할 수는 없다. 올해 아트 바젤 파리에서는 하우저앤워스에서 출품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가 2천300만 달러(약 327억 원)에 팔려 거래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6월 스위스 바젤 페어의 최고가 거래액을 넘는다. 아트시를 비롯한 몇몇 외신은 아트 바젤 파리가 아트 바젤보다 국제 컬렉터의 비중이 높았고, 판매가는 팬데믹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었다고 보도했다. 작년 한 해 숱하게 거론되던 글로벌 미술시장의 위기 가운데서도 이번 파리 페어는 활기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랑 팔레에서 느낀 흥분에 정당한 이유가 생긴 것 같다.
완벽하게 프랑스적인 것과 배타성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프리즈 런던에서 첫 번째 전쟁을 끝내고 아트 바젤 파리에서 2차전을 치르고 있는 한 갤러리스트가 말했다. “올해 이렇게까지 상황이 역전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이래서 미술이 어려워요. 어떤 페어가 성공할지, 어떤 작가가 떠오를지. 알 것 같다가도 어느 땐 이 모든 게 예측 밖의 영역이라고 느껴져요.” 작년까지만 해도 프리즈 런던과 아트 바젤 파리가 미묘한 긴장 속에 경쟁하는 구도였다면,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몇 년간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파리를 찾았다. 그럼에도 올해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브렉시트 이후 프랑스의 세제 개편, 경매 제도,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런던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이전하려는 갤러리들의 움직임으로 현대미술의 중심축이 살짝 움직였다. 2022년, 오랜 역사의 FIAC이 글로벌 네트워크 아트 바젤과 손을 잡았다. 그로부터 지난 3년간은 끊임없는 조정과 실험의 시기였다. 파리 올림픽도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였고, 페어는 그랑 팔레의 보수 공사로 인해 맞은편 프티 팔레에서 임시로 문을 열었다. ‘파리플러스 파 아트 바젤(Paris+ par Art Base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행사는 지난해 드디어 그랑 팔레에 입성하며 현재의 아트 바젤 파리로 정식 명칭을 바꿨다. 그리고 지금, 디렉터 클레망 들레핀(Clément Delépine)의 표현대로 “첫 번째 정상적인 에디션”이다.
갤러리스트는 겸양 떨며 말했지만, 어쩌면 지극한 농사의 결실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3년 동안 아트 바젤 파리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올해는 특히 ‘프랑스적인 것’, ‘파리다운 감각’에 대한 이 도시의 자부심이 한층 두드러진다.(그럼에도 2022년과 2023년 루브르의 큐레이터가 튀일리 공원에서 절묘하게 선보인 공공 프로그램이 장소를 옮긴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튀일리만큼 파리다운 야외 공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트 바젤 파리의 공공 프로그램의 일환인 «Niki de Saint Phalle, Jean Tinguely, Pontus Hulten»은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 니키 드 생팔을 중심으로, 남편 장 팅겔리와 이들을 후원한 큐레이터 퐁튀스 휠튼의 실험적 미학을 깊이있게 조명한다.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Echo Delay Reverb: American Art, Francophone Thoughts»는 아예 프랑스의 철학이 미국의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이미지와 언어가 어떻게 전 세계에 진동했는지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 ‘프랑스다움’이 배타주의와 만나니 상황이 미묘하게 흘러간다. 올해의 화두는 ‘아방 프리미에르(Avant-Premiere)’다. 원래 바젤은 프리즈에 비해 보다 폐쇄적인 페어이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 것이다. 지난해 퍼스트 초이스 VIP 오프닝 데이에 많은 인파가 몰린 후 아트 바젤 파리가 새롭게 도입한 방식이다. 참가 갤러리는 각자 선택한 컬렉터 최대 여섯 명에게 초대장을 발송할 수 있었다. 반응은 엇갈렸다. 소수의 갤러리에게는 효과적인 전략이었을지도 모르나, 대다수에겐 아니었다. 본격적인 판매는 결국 이튿날부터 이루어졌다. 2024 아트 바젤과 UBS의 글로벌 컬렉팅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미술시장은 지난 2년간 판매 감소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긍정적인 신호는 새로운 컬렉터가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판매에서 가장 중요한 첫째 날, 극소수의 슈퍼 VIP만 입성 가능한 페어가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지 물음표를 지울 수 없다.
디렉터 클레망 들레핀이 갤러리 라파예트의 예술재단 라파예트 앙티시파시옹의 수장으로 이동하면서, 내년의 아트 바젤 파리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였던 카림 크리파(karim crippa)가 지휘한다. 아트 바젤 파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굳힐 것인가.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에디터의 시선을 사로잡은 두 개의 전시, 두 명의 아티스트.
CRISTINA BANBAN
하퍼스 바자 페로탕 파리에서 열리고 전시 «Cristina BanBan: Lorquianas»는 아트 바젤 파리가 열리는 동안 제가 본 가장 흥미로운 위성 전시였어요. 원래 이 전시는 그라나다 알함브라 미술관으로부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삶과 유산을 탐구해달라는 요청에서 출발했다죠. 로르카는 스페인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민중 시인이지만, 한국의 대중에게는 깊이 조명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의 희극 작품이 종종 연극 무대에 오르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비극적인 죽음이 더 회자되곤 하죠. 로르카의 삶과 글 가운데 어떤 면이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했나요?
크리스티나 반반 제가 처음 접한 로르카의 작품은 시집 〈집시의 세계(Roman- cero Gitano)〉였어요. 로르카는 신화, 자연, 비극을 뒤섞어 안달루시아 세계를 표현했는데, 그 언어의 풍요로움과 표현의 탁월함에 매료되었죠. 감정과 인간 존재를 다루는 솜씨는 정말 놀라웠고 그의 희곡, 시, 산문 모두 나에게 거대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어요. 그를 통해 인간의 원형과 상징, 예술가의 사적인 삶, 당시 스페인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탐구했습니다. 특히 저는 로르카의 작품에서 언제나 중심이 되는 여성의 역할에 집중했죠. 그리고 이 이야기가 오늘날의 시각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고민했어요. 로르카는 자기 자신을 사로잡은 주제이기도 한 욕망, 자유, 억압, 죽음을 여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표현합니다. 그에게 여성은 생명, 욕망, 열정이자 동시에 고통, 억압, 비극을 상징하죠. 결국 드러나는 것은 내면의 자유와 사회적 굴레 사이의 갈등입니다. 저는 로르카가 다뤘던 사회적 억압이나 세대 간 전승되는 규율 같은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퍼스 바자 동의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로르카의 이야기가 계속 읽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다시 이번 전시 이야기로 넘어가면, 〈Yerma〉 〈Luto y Ajuar〉 〈Multitud〉 〈Venus〉 〈Clown〉 등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게 눈에 띕니다. 이런 대비와 긴장이 이번 연작의 핵심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크리스티나 반반 로르카의 세계에서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파괴하는 두 개의 대립된 힘으로 나뉘어 있죠. 이런 긴장은 욕망과 죽음, 자유와 규범이 공존하며 충돌하는 로르카의 비극적 인생관을 반영하기도 하고요. 제 그림 속에서도 그의 우주를 이루는 주요 축들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Yerma〉에서는 생명과 죽음, 욕망과 억압이라는 대비가 있고, 〈Luto y Ajuar〉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도 자유와 억압이 투쟁합니다. 〈Venus〉의 비너스는 생식 능력, 욕망, 여성성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죄의식이나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죠. 반면 〈Clown〉의 광대는 대중극의 인물로 내면의 고통을 감추고 있죠. 제 그림 속 인물들은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즉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과 진짜 나 사이의 갈등을 비추는 존재예요. 마치 부서진 거울처럼요.
하퍼스 바자 여성의 신체는 상당 기간 동안 당신 작업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오직 여성의 몸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고 믿나요?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 가장 신경 쓰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크리스티나 반반 신체의 구성과 정적인 자세 속에서의 미세한 움직임이 회화를 완성시키죠. 진실은 보는 이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저는 그저 눈빛, 시선, 혹은 그 시선의 부재, 그리고 노출과 소멸의 균형에 집중하며 그립니다.
하퍼스 바자 여성들의 손을 유난히 강조하여 표현합니다. 여자의 손에 어떤 의도와 감정이 담겨있나요?
크리스티나 반반 손은 무척 매혹적이고 표정이 풍부한 신체 부위예요. 제가 손이라는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유죠. 손은 제 회화에서 긴장감과 생동감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하퍼스 바자 그림 속 어떤 여성들은 당신을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2025년 현재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이자 작가로서, 이 여성들은 당신과 어떤 관계에 있나요?
크리스티나 반반 매번 상황에 따라 달라요. 그들은 모두 저이기도 하고, 모두 관람객 자신이기도 하죠. 때때로 작업실에서 조용히 그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들이 저를 바라보고 어딘가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결국 타인을 향한 관심과 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뒤섞여 있는 셈이에요.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경험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죠.
하퍼스 바자 당신은 바르셀로나 태생으로 2012년 런던으로 건너가 2019년 뉴욕에 정착했죠. 오늘날 뉴욕에서 현대미술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최근의 작업실 풍경이나 일상 리듬을 묘사해줄 수 있는지요?
크리스티나 반반 뉴욕은 끊임없는 자극의 도시예요. 그 에너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도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도록 저를 계속 전진하게 만들어요. 때로는 그 속도가 실제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렵지만요. 아침엔 짐에서 운동을 하고, 정오쯤 작업실에 도착해요. 전날 그린 작품을 다시 살펴보고 음악을 틀면서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 후엔 온몸이 피로를 느낄 때까지 그림을 그려요. 대부분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죠. 아, 그래도 중간엔 꼭 낮잠을 잔답니다. 이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저의 오랜 습관이에요.
하퍼스 바자 작업하는 동안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크리스티나 반반 그림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예요. 그 순간에는 세상의 모든 문제와 복잡함이 사라집니다. 저에겐 일종의 명상이죠.
하퍼스 바자 마지막으로, 예술에서 당신이 믿는 하나의 ‘주관적 진실’이 있다면요?
크리스티나 반반 “시작은 이미 끝이다.”
JONATHAN VINEL
하퍼스 바자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열리는 단체전 «Exposition-Generale»에서 저는 당신의 영상 작품 〈Maritn Pleure〉 앞에 가장 오래 머물렀어요. 처음엔 경찰과 싸우고 폭행에 가담하고 자동차를 훔치는 주인공 마틴이 폭력배라도 되는 줄 알았지만, 실은 그저 잃어버린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평범한 10대 소년이더군요. 온통 회색빛인 이 영상의 배경은 2013년 출시된 비디오게임 ‘Grand Theft Auto V’(이하 GTA)에서 가져온 이미지라고 알고 있는데요. 외로움, 그리움과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비디오게임 속 폐허와도 같은 가상공간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나단 비넬 이 영상을 작업할 당시 저의 오랜 작업 파트너인 카롤린 포지(Caroline Poggi)와 저는 첫 장편영화 〈Jessica Forever〉의 자금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하릴없이 게임을 하는 데 썼죠. GTA 2가 출시된 이후부터는 줄곧 그 게임만 했거든요.(웃음) 저는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가상세계인 게임이 어쩌면 현실의 그 어떤 곳보다도 개인의 방황을 환대하는 공간이라 믿어요. 저 역시 게임 안에서 수없이 방황하고 성장했고요. 누구에게나 공유된 공간 안에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겐 이 작업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과 유사하다 느끼기도 했어요.
하퍼스 바자 그렇다면 당신에게 디지털 세계는 단순히 가짜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종의 피난처 같은 곳일까요?
조나단 비넬 저와 제가 속한 세대, 그보다 훨씬 젊은 세대에게도 가상공간은 이상적인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체성을 자각하고, 환대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피난처로 더없이 좋은 조건 아닐까요? 게임 속 캐릭터를 고를 때를 생각해 보세요. 의상 같은 아이템이든, 머무는 환경이든 자기 이미지와 비슷하거나 취향을 반영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자연스럽죠. 얼마든지 개인적인 욕망과 이상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물론, 이런 점을 역으로 활용해 없던 욕망을 만들고 교묘하게 조정하려는 게임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게임이 구축해놓은 서사를 순순히 따라가면서 플레이하진 않아요. 마음대로 벗어나고, 탐험해요. 제 방식대로 서사를 만드는 거죠. 〈Martin Pleure〉도 배경의 이미지를 가져왔을 뿐이지, 게임의 서사를 따르고 있진 않아요.
하퍼스 바자 인물의 독백 내레이션과 배경 음악처럼 게임에 없던 요소들을 새롭게 추가할 땐 어떤 기준이 필요했나요?
조나단 비넬 예산 문제로 돈이 많이 드는 카메라 무빙은 시도할 수 없었지만(웃음) 그 외에는 픽션 영화를 만들 때와 동일하게 촬영과 편집을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는 다른 픽션 작업을 할 때도 단순한 연출을 지향한다는 얘기예요. 사운드는 프랑스에서 영화 작업을 주로 하는 사운드 엔지니어 뤼카 도메장(Lucas Domejean)과 함께 완전히 새롭게 편집했기 때문에, 원래 게임의 소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온통 회색빛인 이 영상이 어딘가 친밀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면 음악의 역할이 컸을 거예요. 마틴의 내레이션은 배우 폴 아미(Paul Hamy)가 맡아줬어요. 개인적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라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색채는 채도와 대비를 약간 높였을 뿐, 게임 원본을 충실히 따랐고요.
하퍼스 바자 〈Martin Pleure〉도 그렇듯, 당신의 작품에는 폭력과 상실 같은 어두운 감정이 지배적으로 느껴집니다. ‘폭력’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려는 이유가 있나요?
조나단 비넬 제 작품 속 폭력은 파괴보다는 즐거운 분노를 수반해 새로운 길을 만드는 행위에 가까워요. 이건 제 음악 취향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고요. 카롤린과 저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떠나 진심으로 음악을 좋아해요. 중학생 땐 하드코어(Emotional hardcore/ Hardcore)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어요. 그때 느꼈던 에너지와 분노, 폭력, 슬픔이 제게 깊이 각인되었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죠. 작품 속 인물들에겐 폭력 말고, 감정 변화가 빠르다는 특징도 있어요. 모든 면에서 불안정하죠. 스스로를 단일한 존재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퍼스 바자 그럼에도 작품에서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궁극적으로 우정과 사랑에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겠죠. 폭력의 대척점에 있는 사랑은 언젠가 닿고 싶은 이상향인가요?
조나단 비넬 어렸을 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랑은 합리적이지 않아요. 모든 저항은 사랑에서 비롯되죠. 사랑을 따라 움직이는 건 죽어가는 세상에 맞서는 일이에요. 그래서 투쟁하는 이들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힘이 세요. 요즘 제 주변에는 지속적인 외로움과 상실로 우울한 상태에 빠지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많아요.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공포와 슬픔을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토록 차갑고 기계적인 세계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타인과 연결되어야 해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제 작품 속 캐릭터들을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언제나 타인을 만나려는 욕망인 것처럼요.
하퍼스 바자 지금 당신이 가장 사로잡혀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조나단 비넬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며 살고 있어요. 저는 이런 극단적 상황을 목도할 때 구체적인 결과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최근 작업한 단편영화 〈La fille qui explose〉에는 가자 지구의 학살과 폭격, 그로 인해 파괴된 이미지, 파시즘과 기후위기 같은 폭력적인 환경이 반영되어 있어요. 그래서 다른 작품에 비해 특히 어둡죠. 현실의 암울한 단면을 볼 때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단절도 필요하겠지만, 제 생각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예요. 저는 계속해서 폭력의 실상을 직시할 겁니다.
지금, 파리에서 놓쳐선 안 될 위성 전시 다섯.
1. Musee d’Art Moderne de Paris
미국 작가 조지 콘도의 최근 회화를 비롯해 초기 드로잉과 조각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회고전을 진행 중이다. “구상과 추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하는 작가의 방대한 예술세계를 종횡으로 펼쳐놓았다. 입구에는 작가가 전시를 위해 직접 짠 플레이리스트로 접속할 수 있는 QR 코드도 있다. 2026년 2월 8일까지.
2. Lafayette Anticipations
마레 지구에 위치한 라파예트 앙티시파시옹은 패션 기업 갤러리 라파예트 재단의 산하 공간으로, 실험적 설치와 퍼포먼스를 다양하게 선보이는 전시장이다. 현재 모로코 출신 작가 마리엠 베나니(Meriem Bennani)의 전시 «Sole Crushing»가 열리고 있다. 동명의 작품에서 타악기로 변모한 플립플롭이 소리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2개 층에 걸쳐 설치된 200여 개의 슬리퍼가 서로 다른 표면을 두드리며 박자를 탈 때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공동체 속 개인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했다. 2026년 2월 8일까지.
3. Thaddaeus Ropac (Paris Marais)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사진 작업을 볼 수 있는 전시 «Photographs»가 열린다. 지금껏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1906년부터 1938년 사이 사진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조각적 형상과 빛의 관계를 탐구한 기록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그의 조각이 떠오른다. 같은 공간에서 미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전시 «Gluts»도 진행 중이다. 대표 조각 시리즈인 〈Glut〉를 이토록 큰 규모로 조명하는 자리는 10여 년 만에 처음이다. 폐유, 자동차 부품, 금속 스크랩 등 일상의 물건들을 조립한 뒤 벽면이나 바닥에 설치했다. 산업사회의 잉여물과 미술 작품 사이 경계를 허문다. «Photographs»는 12월 23일까지, «Gluts»는 11월 22일까지.
4. Palais de Tokyo
팔레 드 도쿄의 «Echo Delay Reverb: American Art, Francophone Thoughts»는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의 부디렉터 나오미 벡위스(Naomi Beckwith)가 예술감독을 맡아 기획한 대형 그룹전이다. 미국의 현대미술이 프랑스의 문화와 어떤 접점을 만들어왔는지를 탐구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신디 셔먼, 줄리 머레투 등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60여 명의 작가 중에는 한국계 미국 작가 차학경도 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조각가 멜빈 에드워드의 개인전도 맞물려 진행된다. 2026년 2월 15일까지.
5. Fondation Louis Vuitton
파리의 건축 랜드마크로도 통하는 루이 비통 재단미술관은 아트 바젤 파리 기간에 맞춰 독일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고전을 선보였다. 1932년 태어난 작가의 생애 초기부터 아흔이 넘어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구성했다. 〈Tisch〉와 같은 초기 사진 기반 회화부터 대형 추상화, 유리와 철강을 활용한 조각, 최근의 드로잉까지. 작가가 실험해온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270여 점의 작품을 빠짐없이 둘러보는 데 족히 3시간은 들여야 할 것이다. 2026년 3월 2일까지.
Copyright ⓒ 바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