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르시시스트는 벌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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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르시시스트는 벌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나만아는상담소 2025-11-25 05:57:00 신고

왜 나르시시스트는 벌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악인은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 그가 사는 곳이 이미 지옥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거나, 직무 유기 중이다

당신은 휴대폰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본다. 당신을 짓밟고 떠난 그는 보란 듯이 승진을 하고, 새 차를 뽑고, 당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근사한 연인과 여행을 다닌다. 그의 소셜 미디어는 ‘성공’, ‘행복’, ‘감사’라는 단어들로 도배되어 있다.

반면 당신의 현실은 어떤가. 불면증에 시달려 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밥맛이 없어 말라가거나 스트레스로 폭식을 하며, 사람을 믿지 못해 방구석에 고립되어 있다.

이 참담한 대조 앞에서 당신은 절망한다. 그리고 묻는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은 다 거짓말인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동화책 속에나 나오는 헛소리인가. 어째서 피해자인 나는 지옥을 살고 있는데, 가해자인 그는 천국을 누리고 있는가.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세상의 저울은 고장 났고, 정의는 죽었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에 속고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필사적으로 연출한 ‘광고’다.

우리는 ‘벌(Punishment)’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번개가 떨어지거나, 그가 쫄딱 망해서 길바닥에 나앉는 것만을 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일차원적인 발상이다.

진짜 형벌은 그렇게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 가장 끔찍한 형벌은, 평생을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단 한 순간도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형벌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살아서 지옥을 걷고 있다. 단지 그 지옥이 화려한 포장지로 덮여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타나토스나 시지프스의 형벌을 떠올려보자.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고, 그것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운명. 혹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영원히 채워야 하는 형벌.

이것이 나르시시스트의 내면 풍경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의 이름은 ‘공허’다. 일반적인 사람은 스스로 자존감을 채울 수 있다. 혼자 있어도 평온하고, 작은 성취에도 만족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가 발전기가 고장 난 기계다. 그들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찬사, 인정, 혹은 타인을 통제할 때 느끼는 우월감이라는 외부 연료(Narcissistic Supply)를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항아리가 깨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찬사를 쏟아부어도, 그것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새어 나간다.

당신이 보기에 그가 행복해 보이는 그 순간조차, 그는 만족을 모른다. 승진을 해도 그 기쁨은 하루를 가지 못한다. 새 연인을 만나도 그 설렘은 몇 주면 증발한다. 그러면 또다시 굶주린 짐승처럼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들에게 ‘만족’이란 없다. 오직 ‘일시적인 안도’만 있을 뿐이다. 평생을 갈증에 시달리며 소금물을 들이켜야 하는 삶. 겉보기에 화려한 연회를 즐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아귀(餓鬼)의 삶. 이것이 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가면은 피부가 되어 숨을 조인다

그는 연기자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완벽한 성공남’, ‘자상한 애인’, ‘유능한 리더’를 연기한다. 연기를 잘해서 박수를 받는다. 당신은 그 박수 소리가 부러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24시간, 죽는 그 순간까지 연기를 멈출 수 없는 배우의 삶을. 보통의 우리는 집에 오면 화장을 지우고,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방귀를 뀌며 뒹군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그 편안함 속에서 우리는 쉰다. 이것이 ‘안식’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이 안식이 없다. 그들에게는 ‘진짜 자아(True Self)’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든 화려한 ‘거짓 자아(False Self)’가 무너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끔찍하게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 수치심(Shame)은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SNS에 사진을 올리고, 일을 벌여야 한다. 가면이 벗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추악한 본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평생을 긴장 상태로 살아야 한다.

당신이 본 그의 미소는, 무대 조명 아래서 짓는 경직된 미소다. 조명이 꺼진 분장실에서 그가 느끼는 공포와 피로감을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단 한 번도 관객석에 앉아 쉬어본 적이 없다. 그는 영원히 무대 위에서 춤춰야 하는 저주받은 빨간 구두를 신고 있다.

연결되지 못하는 고독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연결’에서 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진심을 나누고, 서로의 영혼이 맞닿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온기가 우리를 살게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기능을 상실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인은 도구, 장식품, 혹은 밥줄일 뿐이다. 당신이 냉장고나 세탁기와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타인과 연결되지 못한다.

그의 주변에 사람이 많아 보이는가? 그들은 모두 그의 연극에 동원된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가 돈이 떨어지거나, 늙고 병들거나, 매력을 잃는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갈 관계들이다. 그도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시험하고, 통제하려 든다.

군중 속의 고독. 화려한 파티장 한가운데 서 있지만, 유리 벽에 갇혀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는 상태. 그 절대적인 고립감이야말로 그가 매일 밤 마주하는 지옥이다. 당신은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아파하지만, 그는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각기관이 없이 태어난 장애인이다. 따뜻함을 느껴본 사람은 추위를 알지만, 따뜻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얼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반성 없는 삶이라는 저주

당신이 가장 억울해하는 지점은 이것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요.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요.”

맞다.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사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남 탓이고, 자신은 언제나 억울한 피해자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것이 그들이 받는 가장 큰 형벌이다.

‘반성’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성장시키는 유일한 문이다.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고,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껍질을 깨고 더 큰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반성 기능이 고장 났기에, 성장할 수 없다. 그들은 20대에도, 40대에도, 70대에도 똑같은 유치한 패턴을 반복한다. 똑같은 이유로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방식으로 상처 주고, 똑같이 버림받거나 도망친다.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로 늙어간다.

자신의 인생이 왜 이모양인지 영원히 깨닫지 못한 채, 죽는 순간까지 남 탓만 하며 원망 속에 눈을 감는 삶. 영혼의 키가 단 1cm도 자라지 못하고 정체된 채 생을 마감하는 것. 이것보다 더 끔찍한 저주가 있을까.

심판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당신이 그가 벌받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당신이 아직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성공, 보여지는 행복, 타인의 부러움. 이것들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면 그는 승리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시선을 ‘영혼’의 차원으로 옮겨보라. 평생을 채워지지 않는 허기 속에 사는 삶. 가면 뒤에 숨어 떨고 있는 삶. 타인과 단 한 번도 진실하게 닿지 못하는 삶. 늙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삶.

그것이 부러운가? 당신은 그와 당신의 영혼을 맞바꾸고 싶은가? 아닐 것이다. 억만금을 줘도 그런 괴물의 내면을 가지고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신을 원망하지 마라. 인과응보는 이미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그 자신으로 사는 것(Being Himself), 그것이 바로 그에게 내려진 가장 가혹하고 영원한 형벌이다.

당신은 그 지옥행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찰과상을 입고 다리가 부러졌지만, 당신은 이제 철로 밖의 푸른 들판에 서 있다. 열차는 화려한 조명을 켜고 폭주하며 절벽을 향해 달려간다. 그 안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웃고 있는 그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길을 걸어라. 그가 갇힌 그 화려한 감옥을 뒤로하고, 당신만의 자유를 향해.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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