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정책 펀드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이번엔 어떤 산업을 키우려는 걸까'를 기대한다. 그런데 정작 관련 문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K-컬처와 연결된 전략은 갈수록 비어 있다. 세계를 뒤흔든 한류가 국가 전략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은 의아함을 넘어 위기 신호에 가깝다.
이 현상은 결국 한국의 문화정책이 여전히 '지원사업 공모'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산업은 정책적으로 고속도로가 깔렸지만, K-컬처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셈이다.
◇ 기술벤처에는 있고, K-컬처에는 없는 것
한국의 벤처 정책은 지난 10여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아이디어 단계의 기술창업자는 민간 투자와 정부 매칭을 결합한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 지원'(TIPS)를 통해 초기 리스크를 줄인다. 이후 매출이 성장하면 확장(스케일업) TIPS·성장단계 펀드가 연결되고, 글로벌 진출 단계에는 해외 TIPS·수출금융·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이 기다린다.
제조기업은 산업통상부 연구개발(R&D)·스마트팩토리·소부장 정책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ICT 기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AI·클라우드·5G 인프라와 접속된다. 마지막에는 정책금융·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이 레버리지를 더한다.
한마디로 기술벤처는 '계단식 성장 경로'를 따라가면 되고, 국가는 그 계단을 미리 설계해왔다. 이것이 한국을 짧은 시간에 기술 강국으로 만든 핵심 시스템이다.
반면 K-컬처에는 이런 구조적 사다리가 없다. 지역의 작은 기획사가 뛰어난 뮤지션을 발굴해도, 장기투자를 받을 전용 자본 풀과 정책금융이 없다. 콘텐츠 IP를 담보로 대출받거나, 프로젝트 수익을 바탕으로 한 구조화 금융상품도 극히 제한적이다. 결국 제작할 때마다 대출·사채·선급금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교육 생태계도 비슷하다. 기술 분야는 대학·연구소·대기업·스타트업이 서로 인력과 프로젝트를 주고받는 체계를 갖췄지만, 문화 분야는 여전히 개인 역량·소규모 기획사의 의지와 플랫폼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구조가 지속된다.
축구에는 유소년 시스템이 촘촘하지만, 음악·영상·게임·웹툰 인재에게는 '알아서 버텨라'는 식의 구조가 남아 있는 셈이다.
◇ 문화산업은 이미 '기술 산업'으로 전환
글로벌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의 디즈니, 아마존, 넷플릭스는 AI·가상 프로덕션·디지털 휴먼·실시간 렌더링 기술을 접목해 콘텐츠를 '첨단 기술 사업'으로 운영한다. 유럽연합은 저작권·IP 데이터베이스, 유럽 단일 디지털 시장을 통해 창작자 보호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추구한다. 호주는 문화기업에 대한 세액공제·장기투자 인센티브를 기술기업과 같은 수준으로 적용하며, 스크린쿼터·리베이트를 정교하게 설계해 해외 제작사까지 끌어들인다.
세계는 콘텐츠를 더 이상 '행사·관광·축제'가 아니라, AI·클라우드·데이터·IP 비즈니스가 결합한 기술집약형 산업으로 본다.
반면 한국의 문화정책은 여전히 지역 축제 지원, 공연 행사, 관광 연계 기획 등 20년 전 방식을 반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공모사업의 단기성과 위주로 기획되다 보니, 장기적 관점으로 IP 개발이 어렵고, 창작자 교육·트레이닝이 쉽지 않다. 여기에 해외 공동제작 인프라 구축 같은 기반 사업은 시간이 오래 걸려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마치 세계는 콘텐츠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소액 행사 공모로 대응하겠다는 그림에 가깝다.
현장의 소모감은 더 크게 나타난다. 국내 가수의 경우 스트리밍 단가가 낮아 음원 수익은 박리다매 구조이고, 실질 수익 대부분은 상위 1~2%에게 집중된다. 공연 수익은 대형 플랫폼·기획사 몫이 크고, 중소 기획사는 제작비와 인건비를 겨우 충당하기 바쁘다. 영상·웹툰·게임도 플랫폼 종속 구조가 강해 상위 노출 경쟁에 따라 수명과 수익이 크게 좌우된다.
중소 기획사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교육·트레이닝·연습실 운영·장기 프로젝트 투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는 플랫폼 독점과 고비용·저보상 구조가 이어져 불안정 고용이라는 전형적인 악순환을 낳는다.
기술벤처에는 자본·법제·연구 개발·글로벌 진출을 연결하는 지원 체계가 있지만, 문화벤처에는 아직 이런 통합된 구조가 거의 없다. 그 결과, 창작자 생태계는 반복적으로 소진되고, 다음 세대를 위한 기반이 축적되지 않는다.
지역 문화 생태계의 문제도 뿌리가 같다. 춤·음악·영상·공연 인재를 키우려면, 상시 연습 공간, 지역 미디어센터·레지던시, 지역 브랜딩과 연계된 IP 개발, 지역 대학·전문학교와의 연계 교육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 사업은 '축제와 관광객 유치'에 초점을 맞추고, 건별로 프리랜서·팀을 섭외해 무대를 꾸리는 방식이다. 축제는 끝나면 사라지고, 인력·경험·네트워크가 지역에 자산으로 남지 않는다.
반대로 제조업은 산업단지, 테크노파크, 지역 R&D 센터, 특화고·폴리텍·대학, 세제 혜택·인력양성사업 등을 '패키지'로 제공받는다. 기술은 구조화되고 문화는 파편화된 상태다.
◇ 화려하지만 기초 체력은 약해지고 있는 K-컬처
지금 한국은 BTS, 블랙핑크, K-드라마, K-무비 덕분에 세계에서 엄청난 문화 영향력을 누리고 있다. 만약 이 성공이 '시스템의 힘'이 아니라 특정 세대·특정 기업의 과잉 헌신과 우연한 기회에 가까웠다면, 그 지속가능성은 담보하기 어렵다.
기초 체력이 약한 상황에서 상징적 스타와 작품만으로 버티는 구조는, 팬이 떠난 뒤 유지 보수도 안 되는 놀이공원과 닮았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내부 인프라와 인력이 갈수록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한류 붐이 꺼져가는 어느 시점에는 '왜 그때 시스템을 안 만들었느냐'는 질문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개별 공모사업 몇 개가 아니라, 벤처 정책 수준의 종합 K-컬처 전략이다. 핵심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작자 교육과 육성 생태계 구축을 해야 한다. 음악·영상·게임·웹툰·공연 등 분야별로 '유소년-아마추어-준프로-프로'가 연결되는 교육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예술대·콘텐츠대학·직업학교·지역센터와 연계한 상시 훈련 프로그램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지식재산권에 금융과 정책금융을 동시에 도입해야 한다. 저작권·캐릭터·포맷·스토리 IP를 담보로 할 수 있는 전용 펀드·보증·대출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수익공유 모델 등 장기투자 유도 금융상품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기술과 AI 기반 제작 인프라를 넓혀야 한다. 지역별 가상 프로덕션 스튜디오, 공용 편집·후반작업 센터 구축은 필수다. 생성형 AI, 모션 캡처, 실시간 렌더링 등 첨단 기술과 창작 현장의 결합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
넷째, 글로벌 공동제작과 유통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해외 방송사·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음악사·게임사와의 공동개발 펀드를 활성화하고 번역·현지화·해외 마케팅을 통합 지원하는 '한류 수출 허브'를 설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책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문화정책을 '지원사업'이 아니라 '국가 핵심 성장전략'으로 격상해야 한다. 과학기술·산업·금융·외교 부처와의 공동 협력체계가 구축돼야 한다.
도로가 울퉁불퉁한 상태에서 아무리 많은 차를 보내도 속도가 날 수 없듯, 지금의 K-컬처는 세계적 성과에 비해 정책적 기반이 턱없이 약하다. 기술벤처에 TIPS·확장·글로벌 사다리가 있듯, 문화벤처에도 '창작-제작-투자-유통-재투자'가 이어지는 구조적 사다리가 필요하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문 기술 강국이자 문화강국이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결합할 수 있다면, 앞으로 10년간 한국의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반대로, 지금의 기회를 놓친다면 한류는 한 세대짜리 반짝 현상으로 남을 위험도 크다.
이제 문화산업을 '축제·행사 예산'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 반도체·배터리·AI와 나란히 놓이는 '국가전략 산업'으로 격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이 그 변화를 시작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전태수 웹 3.0·블록체인 전문가
▲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장. ▲ 한국인터넷미디어윤리위원회 이사장. ▲ 세계스타트업포럼 대표.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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