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손수경 작가의 개인전 ‘Silence’는 옻칠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통해 시간성(time)과 고요(silence)를 회화적 경험의 전면에 내세운다. 전시는 무엇보다 ‘표면(surface)’이라는 장소가 단순한 시각적 장(field)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과 감각의 흔적이 드러나는 현상적 공간임을 강조한다. 손수경의 작업은 대상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가 침전된 물질적 표면으로 기능하며, 그 표면은 관람자를 시각적 통과가 아닌 체류와 지각의 지연으로 유도한다.
옻칠은 기본적으로 느린 매체다. 한 번의 칠, 건조, 재도장이라는 반복은 공정을 위한 절차가 아니라, 작업의 시간성과 개념적 중심을 형성하는 핵심 구조이다. 손수경은 느림을 통제하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옻이 스스로 굳고, 스며들고, 미세한 변화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는 매체적 우연성에 기대는 태도가 아니라, 물질이 갖는 시간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에 가깝다. 손수경의 표면은 인위적 효과를 배제한 채, 물질의 자연적 호흡과 손의 반복적 리듬이 결을 형성하도록 허용한다.
이러한 태도는 화면의 시각적 결과물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손수경의 화면은 외광을 반사하기보다는 내부에서 명도가 서서히 배어나오는 구조를 보인다. 이는 단순한 색의 명도 차가 아니라, 레이어(layer)의 깊이와 그 너머의 시간성이 결합된 결과다. 옻칠의 층위는 육안으로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투명하지만, 빛의 굴절은 오히려 그 축적된 두께를 감지하게 만든다. 따라서 관람자는 색이 아니라, 광·층·시간의 관계를 읽어내게 된다.
작품에 사용된 난각 역시 소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난각의 조각들은 표면 위에서 마치 미세한 지층처럼 기능하며, 면적적 구성은 시각적 효과보다 물질의 구조적 본질을 강조한다. 특히 난각이 지닌 미세한 굴곡과 조직감은 옻칠의 매끄러운 깊이와 충돌하거나, 때로는 조화롭게 병치되며 표면의 감각적 긴장을 형성한다. 이러한 물질적 대비는 고요를 단순한 정적 상태가 아닌, 지속적인 미세 운동이 존재하는 긴장된 평면으로 만들어낸다.
작가가 밝힌 “비워내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충만”이라는 문장은 작업의 경험적 차원을 드러내지만, 작품을 비평적으로 읽을 때 이는 물질적 층위의 고백이라기보다 주체가 매체의 속도에 의해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손수경의 작업은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매체와 물질의 시간성에 자신을 조율해가는 과정이며, 이 조율의 결과로 도달하는 ‘고요’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지각의 재배치에 가깝다.
하랑갤러리의 전시 공간 속에서 작품들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각자의 깊이를 유지한다. 이는 작품들 간의 연속성보다 각 작품이 가진 독립적 시간성을 강조하는 설치 방식으로 보인다. 관람자는 작품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그 표면 속에 응축된 느림과 축적의 리듬을 감각하게 된다. 손수경의 ‘Silence’는 침묵을 주제로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공정·시간·지각이 서로 부딪히고 조응하는 복합적 구조를 조용한 표면 속에 담아낸다.
결국 전시는 고요를 재현하는 고요가 어떻게 형성되고 인지되는가를 탐구하는 전시에 가깝다. 손수경의 작업에서 고요는 정적이 아니라 느린 시간의 흔적이 결로 드러나는 과정, 즉 시간의 표면화이다. 손수경은 옻칠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면을 다시 사유하게 하고, 표면을 응시하는 우리의 감각 또한 다시 정렬하게 만든다. ‘Silence’는 그 재배치의 순간을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체험하도록 요구하는 전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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