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N] 지옥은 더 이상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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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N] 지옥은 더 이상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다

뉴스컬처 2025-11-15 00:01:00 신고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4세기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인간이 삶과 죽음, 죄와 구원을 어떻게 통과하는지를 기록한 거대한 서사였다. 그러나 2025년 서울 대학로에서 단테는 뜻밖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옥은 더 이상 죽은 뒤의 세계가 아니라, 청년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환경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프로젝트SOL의 '헬-로우(Hell-Low), 단테'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고전의 저승 세계를 동시대 한국의 자본주의 현실 위로 불러낸다.

연극 '헬-로우(Hell-Low), 단테' 공연모습. 사진=프로젝트SOL
연극 '헬-로우(Hell-Low), 단테' 공연모습. 사진=프로젝트SOL

작품의 시작은 익숙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작품 속 단테는 더 이상 지하세계의 문을 통과하는 순례자가 아니다. 빚 독촉, 투자 실패, 소모적인 노동에 시달리다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단테의 무너짐은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며, 무대 위 첫 장면부터 관객은 그 현실의 공기를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극은 단테의 추락을 비극적 이미지로만 다루지 않고, 그가 발 딛고 있던 구조를 세밀하게 드러내며 새로운 해석의 지점을 만든다.

단테가 눈을 뜬 곳은 저승의 입구로 설정되지만, 그 공간은 관객의 일상과 묘하게 닮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업무,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압박, 성과를 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강박이 뒤엉킨 채 한 사람을 조여 오는 구조적 힘이 무대 위에 부유한다. 이처럼 작품은 저승이라는 판타지적 배경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감각을 강화한다. 현실의 폐색감이 단테의 여정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프로젝트SOL은 이번 작품에서도 움직임을 중심에 놓는다. 배우들의 몸은 사회적 압력과 욕망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코러스는 장면마다 형태를 바꿔 등장하고, 단테의 숨통을 조이는 존재이자 지옥의 문이자 욕망의 생명체로 변모한다. 신체가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은 단테가 걸어가는 세계가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무대 전환은 상징적 장치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배에서 기차, 기차에서 비행기로 이어지는 이동은 자본주의 역사의 단계와 맞물린다. 항해, 산업화, 세계화로 이어진 흐름이 무대 위를 통과하면서 단테의 여정은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인류 문명의 축적된 결과로 확장된다. 장면들은 파편처럼 흩어지지 않고 시대의 궤적을 따라 하나의 큰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 여정 속에서 등장하는 빛의 요정 네비길리우스와 뱃사공 카론은 단테를 이끄는 안내자이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기억이다. 단테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만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은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잊히기 쉬운 인간적 가치의 회복을 은유한다. 단테가 건너는 '망각의 강'은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망각의 속도와 연결된다.

프로젝트SOL의 고유한 미학은 작품 전반에 스며 있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되 그 가벼움이 결코 비어 있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 그리고 유희적 장면 속에서도 구조적 현실의 단단한 결을 드러내는 균형감이 그 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캡틴(Capital)'의 세계는 만화적 과장을 통해 자본의 절대성을 표현하고, 의자뺏기 퍼포먼스는 익숙한 놀이의 형식을 빌려 잔혹한 경쟁의 속성을 드러낸다.

연극 '헬-로우(Hell-Low), 단테' 공연모습. 사진=프로젝트SOL
연극 '헬-로우(Hell-Low), 단테' 공연모습. 사진=프로젝트SOL

작품에서 단테의 지옥은 과거의 상징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지옥의 열 층은 사회의 계층과 욕망의 층위를 연상시키고, 죄의 무게는 성과의 수치로 대체된 듯 보인다.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잃어버린다.

프로젝트SOL은 이런 상실의 감각을 고발하듯 드러내기보다, 연극적 상상력으로 변주하며 감각의 층위를 넓힌다. 슬픔과 웃음, 절망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이 자연스레 이어지고, 관객은 비극적 현실을 압도적으로 인식하는 대신 그 안에서 남아 있는 가능성을 천천히 체감하게 된다. 작품이 추구하는 것은 절망의 확대가 아니라 감각의 회복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흔히 '헬조선'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되곤 한다. 그 표현 속에는 과도한 경쟁과 성과 중심 시스템, 사회적 안전망의 부족 등 여러 층위의 피로가 축적되어 있다. '헬-로우, 단테'는 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마주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적 장치들을 통해 다른 시야를 제시한다. 그 시야는 관객에게 무대 밖 일상의 무게를 다시 구성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단테의 여정이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회복의 과정은 특정한 결말로 규정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스스로의 삶 속에서 어떤 가치를 되찾아야 할지를 생각하도록 여백을 남긴다. 이 여백은 작품의 핵심이자 프로젝트SOL의 방식이다.

'헬-로우, 단테'는 고전이 동시대와 만날 때 어떤 울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다. 저승의 판타지는 현실의 비유로 전환되고, 절망의 서사는 회복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지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조용히 일러준다. 연극이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가 삶의 무대 바깥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이라면, 이 작품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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