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촬영은 ‘달슬’이와 함께했다. 미용학원에서 불법 번식과 가위질 연습용 도구로 학대받다 구조돼 현재 올리브동물병원에서 임시보호 중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또 노령동물은 시간의 기록이고, 유기동물은 사회의 얼굴이다. 사회에서 무가치하거나 관심밖에 있는 대상처럼 취급받는 그들을 돌본다는 건 한 생명을 넘어,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결과와 마주하는 일과 같다. 그들을 치료하면서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윤리, 제도 방향, 돌봄의 언어까지 고민하게 된다. 이건 수의사의 사명이라기보다 인간으로서 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노령동물, 개의 세계를 탐색하면서 당신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15년 넘는 시간 동안 동물은 내 스승이었다. 임상수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동물에게 삶을 배웠다. 개와 나이 든 동물을 보면 그들과 그들 가족의 삶이 보인다. 고양이처럼 호불호가 명확하고, 거슬리는 것과 엄격한 기준이 많았던 내가 개를 만나 두루뭉술해졌달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아직 개가 되려면 멀었지만(웃음).
개는 함께 있으려는 동물, 고양이는 혼자가 좋은 동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두 종의 관계적 본질은 얼마나 다른가
인간은 의존적인 동물이다. 나는 개에게서 의존을 배우는 편이고 머리로는 고양이를 닮고 싶어한다. 독립적이고, ‘쿨’하고, 혼자서도 잘 사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개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함께 있으면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을 원하니까. 결국 이건 의존과 독립의 문제가 아니라 공존에 가깝다. 함께 있으면서도 독립적일 수 있고, 독립적이면서도 서로에게 기대는 관계가 가능한 거다. 둘 다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우는 게 아마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정이 아닐까.
인간은 개를 어떤 마음으로 대할까
우리는 동물을 대할 때 환상을 가진다. ‘서로 말을 알아듣고 소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걸 알았을 때 내가 응답할 감응력이 있어야 한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놀아줘, 돌봐줘’가 아니라 고양이처럼 거리를 둘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개든 고양이든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과 아주 다른 존재와 오래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개와 고양이 중 인간을 더 이해하는 쪽은 어디일까
인간과 동물의 공명은 일종의 응답 능력이다. 누군가의 감정이나 신호에 응답할 줄 아는 능력 말이다. 그 응답 능력에 특화된 건 확실히 개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공감의 언어를 정말 능숙하게 쓰는 건 개가 맞다! 만약 이걸 ‘이해’로 부를 수 있다면, 개가 인간과 더 깊이 이해하고 교감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더 인간을 이해하냐’는 질문에 여전히 개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문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박정윤은 올리브동물병원에서 노령동물을 위주로 진료하며, 사육곰 농장에서 곰을 돌보는 단체 ‘곰보금자리’에서 활동, 동물과 인간 세계에 관한 칼럼을 꾸준히 연재하고 있다.
어떻게 반문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인간을 이해해야 하나?’ 많은 사람이 ‘우리 집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물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오히려 무서울 수도 있다. 들을 준비가 안 돼 있거든. 로라 진 맥케이(Laura Jean Mckay)의 소설 〈그 나라의 동물들 The animals in that country〉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상한 전염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 이후로 세상은 지옥이 된다. 까마귀가 지나가며 “꺼져!”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길을 걸으면 개들이 욕을 한다. 돼지는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고. 사람들은 그걸 듣고 너무 괴로워한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는 정말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래서 ‘개가 인간을 더 이해하느냐, 고양이가 더 이해하느냐’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쓰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 서로 다른 우주를 사는 존재들이다. 그 작은 교집합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건, 결국 그들이 인간에게 맞춰 주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이 소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감각을 더 예민하게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그도 그렇지만 먼저 마음을 여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예전에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를 만났을 때 “저도 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동물과 대화하는 건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같아요. 누구나 처음에는 서툴지만, 연습을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바이엘부터 시작해서 체르니를 치고, 나중에는 피아니스트가 되잖아요. 당신도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내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느냐’ 하는 거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관찰하고, 그들의 언어를 읽으려는 자세가 있으면 어느 정도의 교감은 누구나 가능하다.
‘좋은 보호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 아이들은 반포 자이에 안 살아도 된다(웃음). 부자냐 가난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족이 바뀌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내가 부족하지만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고양이는 사람을 키우고 개는 사람을 따른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재미있는 말이다. 이렇게 들린다. 고양이는 사람을 길들이는 쪽에 가깝고, 개는 사람을 모으는 쪽에 가깝다. 고양이는 ‘여기까지’라는 선을 그어주면서 우리에게 기다림이나 동의, 리듬을 가르친다. 반대로 개는 ‘같이 가자’며 우리를 하나의 팀으로 묶는다. 비 오는 날 억지로 산책하거나, 병원 앞에서 떨리는 시간을 함께 버티는 일, 현관 앞에서의 눈맞춤 같은, 그런 헌신이 우리를 다시 사람답게 붙잡아준다. 둘 다 우리를 만드는 존재들이다.
노령견을 진료하면서 ‘치료보다 돌봄’을 중요하게 느낀 순간이 있을까
인간의 연명 치료와 비슷하다. 노령동물을 진료하다 보면, 얼마나 더 오래 살리는가 보다 어떻게 살게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노령동물 가족의 소원이 ‘안 아프게 지내다 떠나는 것’일 거다. 노령동물을 진료하면서 ‘살린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배운다. 죽음을 밀어내고 맞서 싸우는 기술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덜 아프게 살다 떠나는, 한 마디로 잘 죽는 기술이 살리는 기술이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의료에서도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질문인가
대형 병원에서 인간은 최첨단 기술로 암이나 질병과 싸운다. 그러다 보면 환자의 삶이나 고유함은 무시되기 쉽다. 동물 환자도 마찬가지다. 살리는 일은 수명보다 삶의 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숨쉬고 어떻게 사랑받으며 어떻게 떠나는가. 이게 치료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답게 살다가 떠나고 싶은데,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다.
이너 웨어 톱은 Shushu/Tong. 그레이 팬츠와 힐은 Zara.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금까지 당신을 거쳐간 아이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그 질문이 제일 어렵다. 너무 많아서. ‘만두’ ‘똘이’ ‘초롱이’ ‘복실이’ 이름을 다 말하기도 힘들다. 시간이 갈수록 한 친구 한 친구가 전부 마음속에 남는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떠나 보내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진료 중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을 만큼. 지금은 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떠나 보낸 친구들의 기일을 달력에 기록하고, 한 달이 지나면 보호자에게 반드시 문자를 보낸다. 나와 끝을 함께한 모든 친구가 내 일부다. 나를 다듬어주고, 버티게 해주고,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
개는 관계를 통해 존재를 확립하고, 고양이는 관계 속에서 자기경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인간과의 관계는 본능일까
현실은 ‘선택’이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선택한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너와 함께 살겠어’라고 선택한 관계다. 그건 분명 인간의 선택이지,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동물이 대단한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환경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안에서 불평하지 않고,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 그게 너무 대단하다.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삶을 최선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대신 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까.
개의 충성심과 고양이의 자율성, 두 극단의 관계에서 인간은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
관계 맺기에 대한 배움. 개의 충성심과 고양이의 자율성 사이에는 관계를 맺는 두 가지 방식이 숨어 있다. 하나는 끝까지 함께하려는 힘, 다른 하나는 서로를 놓아주는 자유의 감각. 좋은 관계는 개처럼 깊고, 고양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고, 고양이는 신이 되고 싶어한다는 말이 있다. 동의하나
동의하지 않는다(웃음). 그들은 이미 자기 방식으로 충분히 ‘존재하는’ 존재들이다. 개는 인간을 닮으려 하기보다 인간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주 오래 연습해 온 존재이고, 고양이는 인간 세계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놓치지 않는 존재다. 삶의 다른 문법을 가진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개와 고양이는 서로에게서 어떤 면모를 배워야 할까
개가 고양이에게 배워야 할 건 ‘멈춤의 기술’이다. 늘 사랑으로 달려가지만, 때로는 한 발 물러서야 관계가 숨 쉴 수 있으니까. 고양이가 개에게 배워야 할 건 곁을 내어주는 용기다. 혼자 있는 걸 잘 아는 고양이들이 그런 용기를 가진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질 거다.
동물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이드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동시에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간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젊었을 때는 늘 바쁘고, 효율을 따지고, 시간을 쪼개 쓰느라 여유를 몰랐다. 그런데 동물과 함께 나이들다 보면 그 시간의 속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하루가 채워진다. 한 번은 어떤 어르신이 그러더라. “우리 집에는 오전 11시쯤 햇볕이 들어오는데, 우리 고양이가 늘 같은 자리에서 볕을 쬔다”고. 나이가 들고 자신도 같은 시간에 집에 머물게 되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마음이 이해된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따뜻했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함께 늙어가며 시간을 새롭게 경험하는 법을 배우신 거다. 어떻게 그 시간을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동물은 그걸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또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이 존재들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늙은 존재에 대한 배려를 배웠다. 우리 병원에서 보호했던 ‘꼬모쟁이’라는 페니키즈 이야기인데, 눈이 예쁘고 병원에서도 인기 많았던 친구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혀가 자꾸 나와 있고, 눈빛도 예전만큼 반짝이지 않았다. 사람들도 예전처럼 예쁘다고 안 해주니까 꼬모쟁이가 점점 보호자 없는 2층에 올라가려고 하더라. 올려주면 내려가려 하고, 1층으로 내려주면 또 올라가려고 하길래 “꼬모쟁이, 왜 그래?!”라고 소리치니 머쓱한 표정을 짓더라. 그걸 보고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이상한 집게 핀을 언젠가부터 자꾸 머리에 꽂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나이가 들면서 머리 숱이 빠지고, 예전에 수술한 동맥류 자국이 보여서 그걸 가리려던 거였다. 그때 깨달았다. 꼬모쟁이도, 엄마도, 예전의 자신처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똑같구나.
사람과 동물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 혼자로는 살 수가 없다. 주위의 모든 동물로부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인간은 수많은 생명체들과 얽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동물과의 공존은 동물을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당연한 생존 방식일 뿐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개들에게 한마디한다면
그럼에도 잘 이해해 주고, 잘 지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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