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이별은 언제나 느리게 다가온다.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퇴적되어 마음 한켠의 섬처럼 남을 때가 있다. 연극 '소담씨의 이별견문록'은 그 섬을 천천히 거닐며 ‘마주함’이라는 치유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2025년 여름, 영국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프린지에서 'JEJU'라는 이름으로 해외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작품이 한국 무대에서 새롭게 각색되어 돌아왔다. ‘제3회 자막이 있는 연극제’ 참가작으로, 청각장애인을 포함한 다양한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막 연극으로 상연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무대의 배경은 제주, 그리고 한때 가족의 기억이 머물던 할머니의 집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소담은 오랜 상담 치료에도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넨다. 제목은 '소담씨의 이별견문록', 저자는 ‘도깨비’. 그 책의 이야기가 현실로 스며들며, 소담은 잃어버린 감정의 조각들을 다시 마주하기 시작한다.
제주로 돌아온 소담은 집을 팔려는 삼촌, 양복 차림의 남자, 도깨비, 그리고 외면해온 아버지를 차례로 만난다. 돌담과 하얀 자갈로 단순하게 구성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조명과 움직임만으로 감정의 장면을 바꿔간다. 세트 전환 없이 인물의 심리와 관계의 거리만으로 공간이 달라지는 연출은 극의 리듬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밀어올린다.
'소담씨의 이별견문록'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이다. 무대 위에 올라선 가야금 연주자가 배우의 호흡과 함께 실시간으로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 전통악기는 단순한 반주를 넘어 소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제주의 공기와 바람을 상징하는 감정의 언어가 된다. 현의 떨림 하나하나가 관객의 숨결을 따라 진동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제주 방언과 구음(口音)의 사용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인해 때로는 소통이 어긋나지만, 그 어긋남 자체가 작품의 메시지와 닮아 있다. 서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결국 마음의 결로 연결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언어를 초월한 감정의 소통이라는 작품의 주제는 이 장치를 통해 한층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도깨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다. 그의 구음과 몸짓은 인간이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원형을 상징한다. 움직임 연출가 임동섭은 도깨비의 몸짓을 통해
소담의 내면을 시각화하고, 관객이 감정의 심연으로 자연스럽게 빨려들게 한다. 도깨비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소담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의 존재’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것은 배우들의 1인 2역 구성이다. 삼촌과 아버지, 양복남과 의사, 서로 다른 인물이 같은 배우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이는 관계의 반복과 순환, 그리고 상처의 근원이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상징한다. 관객은 익숙한 얼굴 속에서 낯선 감정을 발견하며, 이중의 시선을 통해 인물 간의 거리를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연출가 남승주는 “상처와 이별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공연은 화해의 미학보다 ‘마주함의 용기’를 강조한다. 용서는 갑작스럽게 오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소담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 과정 자체가 곧 치유이며, 그 치유의 여정을 관객이 함께 따라가게 된다.
연극 '소담씨의 이별견문록'은 제주라는 공간을 빌려 ‘이별’을 다시 정의한다.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회복의 과정이며, 잊음이 아니라 ‘다시 바라봄’의 다른 이름이다. 소담이 도깨비를 마주하고,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관객은 각자의 상처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소담씨의 이별견문록’은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그리고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무대 위 인물들의 조용한 화해는 거창하지 않다. 다만 한 사람의 용기, 한 마디의 말, 한 번의 눈맞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한다. 공연이 끝난 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의 걸음이 유난히 느려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만의 ‘이별견문록’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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