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하수민 작가] 출강 중인 학교에서 실기 수업 외의 동아리 수업을 맡게 되었다. 기존에 진행하던 기술 중심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표현과 사고를 중심에 둔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머리가 굳어 버린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최근 진행 중인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여주고 자화상을 그리게 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예전에 지루해서 끝까지 보지 못했던 영화다. 소비형 미디어에 익숙해진 내게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수업 장면이 호흡이 길고 따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내가 추구하는 수업의 취지와 잘 맞다고 판단하여 이번 수업의 도입으로 삼았다.
극 중 핵심 인물인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줄곧 “카르페 디엠, 오늘을 붙잡아라.”라고 말한다. 그 문장은 단순한 청춘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로 존재하라’는 요청이다. 이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본질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누군가 작업의 이유를 물으면 흔히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에 대한 물음 역시 뒤따라올 것이다. 인간은 자아를 가진 동물이기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내외부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을 하며 살아간다. 결국 예술가에게 작업이라는 것은 자신을 증명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기록이라 볼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닐은 배우가 되고 싶은 소년이다. 그의 비극적인 서사는 사회로 인해 내면이 억압당한 개인이 무너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평가와 제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점차 자신을 규격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억눌린 내면을 드러내는 일에 있다. 닐이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던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되찾았다. 그 찰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한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키팅의 교육관은 이상적이면서 때로는 무모하지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너의 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그의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 작업의 동기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시를 쓴다는 것은 곧 나의 언어로 세계를 본다는 뜻이다. 그 언어는 정제된 기술과 미학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때로는 미완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살아있는 진실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교정을 떠나는 키팅을 향해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만큼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 일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교단에 대한 반항이 아닌,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라.”
그 말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창작이란 세상에 맞서는 행위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해지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정직함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교육은 그 정직함을 함께 향하도록 타인을 이끄는 과정이며, 창작의 힘을 길러주는 다른 형태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완벽한 해답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감각을 잃지 않는 일이다. 그 감각이야말로 예술가를 성장하게 하는 근원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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