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형상회로’는 ‘형상’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현재형으로 불러내는 전시다. 형상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정작 지금 우리의 시각 경험 속에서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조금 애매하다. 너무 많은 이미지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대부분은 재현을 가장했지만 사실은 소비를 위해 구성된 이미지들이다. 그 속에서 ‘형상’은 낡은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이 보이는가?” 그리고 “그 보임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1970년대 말 한국 미술은 추상의 거대한 무게 아래 있었다. 형상을 다시 호출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었다. 현실을 다시 바라보겠다는 선언, 혹은 현실이 지닌 불투명성과 정서를 복권하겠다는 시도에 가까웠다. 이 전시는 그때의 긴장과 오늘의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회화라는 오래된 매체가 다시 세계를 붙잡으려 할 때, 그 시도는 다소 불안해 보이지만 동시에 단단한 진심을 품고 있다.
박장년의 인물들은 말없이 시대의 공기를 품는다. 그 얼굴들은 예술사가 말하듯 ‘현실을 재현한다’기보다, 시대의 무게가 표면에 떠오르는 순간을 오래 붙들고 있다. 불안과 체념, 체온과 무게가 캔버스에 묻어난다. 단지 누군가의 초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 속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분위기와 감정이다.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얼굴’이라는 형상이 단순한 묘사가 아닌 감각의 통로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 풍경 회화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형상을 제기한다. 공성훈이 보여주는 회색빛 건물과 공사 장면에는 서사가 거의 없다. 그러나 무표정한 구조물들은 묘하게 현실에 가까운 냄새를 풍긴다. 비가 오기 직전의 먼지, 익숙한 형태인데 정작 이름 붙이기 어려운 풍경, 도시의 심박이 낮아졌을 때 드러나는 구조. 추상도 구상도 아닌 모호한 묘사의 힘이 있다. 현실은 사실 이렇게 약간 흐릿한 상태로 우리 몸에 남는다.
반대로 정석희의 화면에서는 낡은 사진처럼 선명하고 친숙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과장되거나 기이한 방식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금 오래 바라본 물체가 가진 기이한 친밀감이 천천히 드러날 뿐이다. 상징이나 메시지보다는 감정의 무게가 가볍게 얹힌 사물들이다. 형상은 반복된 관찰 뒤에야 온전히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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