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997년, 대한민국은 한파보다 더 매서운 IMF의 바람 속을 걸었다. 거리의 불빛은 희미했고, 청춘의 꿈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그 혹한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웃었고, 사랑했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2025년의 안방극장 속, tvN ‘태풍상사’가 그 얼어붙은 시간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나정·김동휘 감독의 연출, 장현 작가의 각본, 그리고 달파란 음악감독의 감성이 맞물린 ‘태풍상사’는 1997년이라는 시공간을 정교하게 복원하면서도 ‘그때 그 사람들’이 지녔던 온기의 본질을 현재로 불러온다.
이준호가 연기하는 강태풍과 김민하의 오미선은 1997년의 청춘을 그대로 품고 있다. IMF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무너짐보다 버팀을 택한 두 사람은, 한 시대를 관통한 청춘의 얼굴이자 지금 세대의 자화상이다. 이준호는 당시의 감수성을 되살리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레자 재킷과 청청 패션, 브릿지 헤어로 90년대의 공기를 입었다. 김민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아가일 니트를 걸치며, 일과 가족밖에 모르는 현실적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구현했다. 갈매기 눈썹, 팔토시, 잠자리 안경, 그리고 을지로 사무실의 낡은 전화기까지 ‘태풍상사’ 속 인물들은 복고의 모방이 아닌, 살아있는 기억으로 존재한다.
'태풍상사'는 IMF를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시절의 ‘생활’을 고스란히 복원한다. 돌돌이 대신 테이프를 쓰던 시절, 연탄불의 온기, 종이 지도의 질감, 병문안 도시락과 모과 방향제의 향기, '먼나라 이웃나라'로 외국을 알던 어린 시절의 책장까지 ‘태풍상사’는 시대를 추억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의 사람과 물건, 일상의 결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부산 편에서 등장한 ‘슈박 안전화’ 밑창의 “최고의 품질을”이라는 문구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견뎌낸 노동의 품격이자, 산업의 자존심을 품은 말이었다.
그러나 ‘태풍상사’의 진짜 온기는 물건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온다. 아버지의 부의함을 지켜내기 위해 한마음이 되는 동료들, 힘든 생일에 장미꽃 한 송이로 위로를 건네는 친구, 빚에 시달리는 동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상사맨들. 장현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태풍상사'는 IMF의 절망을 다루면서도 결코 냉소적이지 않다. 절망의 시대를 관통하는 것은 돈도, 성공도 아닌, 결국 ‘사람’이라는 믿음이 그 중심에 있다.
강태풍은 무모하지만 뜨겁고, 오미선은 냉철하지만 단단하다.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은 현실의 파도 속에서 부딪히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선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몸부림 속에서 그들의 청춘은 더욱 빛난다. IMF의 폭풍은 그들의 꿈을 무너뜨렸지만, 그들의 진심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서사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청춘들에게까지 닿는다.
이나정 감독은 “1997년 당시를 진정성 있게 고증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이라 말했다. 실제 상사맨들을 만나 취재하고, 박물관에서 전신타자기 ‘텔렉스’를 공수하며 세트를 완성했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 현대아파트, 을지로의 거리들이 재현된 화면 속에서는 90년대의 공기가 그대로 흐른다. 달파란 음악감독의 사운드트랙은 당시의 정서를 세련된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아날로그 선율과 현대적 리듬이 교차하며, 1997년의 기억을 지금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풍상사’는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비춘다. IMF라는 절망의 시대를 유쾌하고 따뜻하게 재해석하며, 여전히 불안한 2025년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건넨다. 회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불확실한 내일 앞에서 여전히 ‘영차’ 하고 있는 이들에게 드라마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위로를 건넨다.
IMF의 혹한을 견뎠던 그 시절처럼, 오늘의 청춘들도 다시 한번 영차하고 일어설 수 있기를.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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