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N]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한국적 미학으로 되살린 고전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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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N]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한국적 미학으로 되살린 고전 비극

뉴스컬처 2025-10-30 14:44:59 신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2015년 초연 이후, 이 작품은 ‘국립극단이 만든 한국형 고전극’이라는 독보적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 연극계에서 창작극이 10년간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일은 드물다. 그 지속성은 연출의 재능이나 배우진의 헌신을 넘어, 동시대 관객이 여전히 이 고전 서사에서 자신들의 윤리와 감정을 발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연출가 고선웅은 원작 기군상의 중국 원대 잡극 ‘조씨고아’의 비극적 구조 위에 한국적 정서를 입히며, 복수의 내러티브를 ‘윤리의 선택’이라는 문제로 치환했다. 작품이 ‘복수극’으로 시작해 ‘인간극’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선웅의 각색은 극적 사건의 흐름보다 인물의 내면을 정교하게 들여다본다. 의사 정영이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희생시키는 서사는, 비극의 서막이 아니라 도덕적 고뇌의 출발점으로 작동한다. 그는 신의와 복수, 도덕과 생존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무대는 절제의 미학으로 설계됐다. 국립극단의 미니멀리즘 전통을 계승한 이태섭의 무대디자인은 ‘비움’의 공간 속에서 상징을 극대화한다. 대형 장치 없이 빛과 그림자, 한지의 질감, 천의 결만으로 구축된 무대는 텅 빈 공간 속에서 배우의 몸과 목소리를 드러내며 관객의 감각을 집중시킨다. 복잡한 세트가 아닌 빛의 리듬과 배우의 동선이 장면의 긴장을 만든다. 이는 고선웅 연출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한국적 미장센’의 결정체다. 고선웅이 전통적 질감을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은 민족주의적 장식이 아니라, 미학적 절제의 실천으로 작동한다.

작품의 진정한 중심은 배우의 존재감이다. 초연부터 함께한 하성광(정영 역)과 장두이(도안고 역), 그리고 이형훈(조씨고아 역)의 연기는 이미 ‘조씨고아’의 신화와도 같다. 세 배우는 10년 동안 인물과 함께 나이 들며, 연극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숙성시켰다. 특히 하성광의 정영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는 절망적 신념을 품은 ‘비극의 인간’을 가장 한국적인 체온으로 구현한다. 올해 새롭게 합류한 원로 배우 이호재(영공 역)는 60년 연극 인생의 무게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세대와 세대가 한 무대에서 공명하며 만들어내는 에너지야말로, 이 작품이 ‘국립극단의 연극사’를 상징하는 이유일 것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권력의 폭주와 복수의 허무, 그리고 화해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불의와 분열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 현재를 비추는 렌즈이고, 작품은 그 렌즈를 통해 ‘오늘의 윤리’를 묻는다. 복수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정영의 결단,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조씨고아의 혼란은, 현대의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모습. 사진=국립극단

고선웅의 연출은 고전을 재창조하는 방법론에 대한 모범답안처럼 느껴진다. 원작을 해체하거나 현대화하는 대신, 본질을 지금의 언어로 번역한다. 서사와 감정, 상징과 절제, 전통과 현대가 균형을 이루는 작품은 한국 연극이 나아갈 한 방향을 제시한다.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로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가지는 의의는 10년의 지속이 아니라, 앞으로도 20년, 30년 이어질 수 있는 생명력에 있다.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이라는 극 중 대사처럼, 이 공연은 한때의 놀이이자 긴 꿈이며, 우리 모두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시대의 서사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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