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국립창극단의 민은경 명창이 오는 11월 1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완창판소리 – 춘향가’로 관객 앞에 선다.
‘완창판소리’는 국립극장의 상징적인 기획으로, 1984년 신재효 타계 100주기를 기념해 시작된 이래 4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판소리 예술의 맥이다. 한 소리꾼이 한 편의 판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하는 이 형식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한 인간의 몸과 호흡으로 시간의 예술을 완성하는 의식이자, 전통의 지속을 증명하는 예술적 실천이다.
무대의 주제인 ‘춘향가’는 조선 후기의 사랑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봉건적 질서가 흔들리던 시대의 기운과 근대적 자아의 탄생이라는 더 깊은 층위가 깔려 있다. 춘향은 그저 사랑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부당한 권력 앞에서 굴하지 않으며, “몸은 죽어도 마음은 굽히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 그 목소리는 시대를 초월한 저항의 언어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울림을 던진다.
판소리는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의 몸과 숨, 그리고 시간이 만든 흔적으로 이어진다. 민은경 명창의 ‘춘향가’가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 명창은 어린 시절부터 전라남도 무형유산 동편제 춘향가 예능보유자 안애란 문하에서 소리를 익혔고, 이후 성우향 바디를 계승했다. 그 바디에는 ‘춘향모 탄식’, ‘돈타령’ 등 여섯 개의 독특한 대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춘향의 감정선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고, 인물의 현실적 고뇌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번 공연은 김세종제를 기반으로 하여, 동편제 특유의 강건한 통성과 함께 섬세하고 정제된 선율로 구성된다. 민 명창의 보성소리 기반 음색은 여기에 맑고 단단한 결을 더한다. 그녀의 소리는 단순히 옛 음악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체온으로 시간 위에 새겨지는 예술의 기록이다. ‘완창판소리’의 의미는 바로 이 지속성에 있다. 한 소리꾼이 몇 시간 동안 한 이야기를 온전히 밀고 나가는 그 집중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예술이란 곧 존재의 윤리이자 인간의 지속성임을 깨닫게 된다.
전통은 고정된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의 대화 속에서 새롭게 숨 쉬는 살아 있는 형식이다. 민은경의 ‘춘향가’는 그 대화의 한가운데 있다. 그녀의 소리는 동편제의 웅혼함을 지니되, 현대의 청중에게 닿기 위한 감각적 균형을 유지한다. 이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예술의 윤리에 관한 태도다.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이 그 안에서 무엇을 느끼고 사유할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번 공연은 전통예술의 재현이 아니라, 시대의 문법을 넘어서는 예술적 발화다. 21세기의 관객에게 판소리는 더 이상 낯선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빠른 일상 속에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느림의 예술이 된다. 민 명창의 소리는 여전히 유효한 정서를 환기한다. 그것은 의로움과 사랑, 저항과 품격이라는, 인간이 오래도록 품어온 감정의 원형이다.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시리즈는 한국적 서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목소리를 통해 집단의 기억을 이어가는 사회적 행위다. 판소리는 문자보다 오래된 기록 방식이다. 한 세대의 소리가 다른 세대의 몸을 통해 전승되는 그 과정 속에서, ‘소리’는 예술을 넘어 인류학적 유산이 된다.
민은경 명창의 ‘춘향가’는 그 유산의 현재형이다. 그녀의 통성은 전통의 무게를 짊어진 소리이자, 동시대 여성 예술가의 주체적 발화로 들린다. 그 목소리는 과거의 춘향이 부당한 권력에 맞서던 외침과 겹쳐지며, 지금의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울린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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