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N] '청사초롱 불 밝혀라', 전통의 상상으로 비추는 오늘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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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N] '청사초롱 불 밝혀라', 전통의 상상으로 비추는 오늘의 감정

뉴스컬처 2025-10-17 15:23:58 신고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조선시대에도 웨딩플래너가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청사초롱 불 밝혀라'는, 전통을 입은 오늘의 이야기다. 조선 최초의 혼례 전문 업체 ‘청사초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은, 사랑과 제도, 축복과 금기를 둘러싼 질문을 흥겹고도 진지하게 풀어낸다. 전통 혼례의 의례성과 현대적 감수성, 잔치의 흥겨움이 공존하는 무대 위에서 관객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정서의 교차로에 서게 된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청사초롱 불 밝혀라'는 공모, 낭독, 본공연이라는 다단계 개발 구조를 통해 무대에 오르기까지 체계적 과정을 거쳤다. 공공기관 주도의 창작 생태계 안에서, 작품은 실험과 실현의 균형을 보여주는 유의미한 결과물이다. 창작자의 상상력이 공공의 지원과 만나 예술로 구현될 수 있음을 입증하며, 공공예술의 방향성과 창작 시스템의 실질적 가치를 동시에 환기한다.

창작가무단 '청사초롱 불 밝혀라'. 사진=서울예술단
창작가무단 '청사초롱 불 밝혀라'. 사진=서울예술단

이야기의 중심에는 혼례가 있다. 그러나 그 혼례는 작품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적 절차를 넘어선다. 그것은 사랑을 사회적으로 증명하고, 공동체가 함께 축복하는 의식이다. 혼례를 통해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제도적 승인이라기보다 감정의 존중이며, 사랑받고 축복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열망이다. '청사초롱'의 행수 윤덕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혼례”를 만들어주겠다는 철학으로 혼례를 기획하며, 그 안에서 제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감정을 중심에 놓는다.

과부의 재가를 둘러싼 갈등은 작품이 품은 가장 강력한 사회적 질문이다. 재가를 금지한 법 아래에서 벌어지는 비혼례는 한 사람의 결혼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여성의 자유와 주체성, 전통과 억압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이자, 오늘날 여전히 반복되는 사랑의 조건화에 대한 비판이다. 윤덕이 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얼마나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축복에는 어떤 조건이 붙는가.

관객을 극 안으로 초대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관객은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하객이자 이웃이며, 잔치의 일부로 존재한다. 서울예술단이 꾸준히 탐구해온 관객 참여형 공연 양식은 '청사초롱 불 밝혀라'에서 더 정교하게, 더 목적의식 있게 실현된다. 혼례라는 집단적 의례에 관객을 직접 개입시키는 방식은, 연극적 기교를 넘어 공동체성 회복의 미학적 기획이다. 축하의 행위는 결국 사회적 연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작품은 공연을 넘어 작은 사회 실험으로 기능한다.

배우진은 탄탄하다. 김건혜는 윤덕이라는 인물에 내면의 강인함과 세련된 유머를 동시에 부여하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지킨다. 이기완이 연기하는 노들은 진정성과 유쾌함을 오가는 감정의 선율을 섬세하게 직조하며,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조연 캐릭터인 수두매 삼총사, 사촌 듀엣, 로랑과 지남 역시 극 속 사회의 층위를 풍성하게 구성하며, 무대를 다채로운 집단극으로 확장한다.

아울러 작품은 음악과 무대 기술의 층위에서도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통 장단과 현대 뮤지컬 스코어의 결합이다. 작곡가 성찬경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리듬 구조를 감각적으로 엮어내며, 혼례의 의례성과 축제성을 동시에 표현해낸다. 빠른 템포의 사설과 판소리적 선율에서부터, 서정적인 발라드, 앙상블 넘버까지의 흐름은 작품의 감정 곡선을 섬세하게 조율한다. 장단은 단지 장식적 도구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와 상황에 직접 반응하는 드라마의 내적 리듬으로 기능한다.

성악적 스타일 또한 주목할 지점이다. 전통과 현대 창법의 접점을 찾기 위해 배우들의 발성과 화성 구성은 다소 유연하게 설계되었고, 이는 관객이 익숙한 뮤지컬 문법 안에서도 낯선 조선적 리듬의 질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뮤지컬의 서양적 문법이 전통의 형식과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음악적으로 설득해낸다.

무대 디자인은 한정된 공간을 유연하게 확장하는 연극적 장치를 적극 활용한다. 무대디자이너 남경식은 전통 혼례의 색채와 공간 구조를 현대적으로 추상화하면서도, 특정한 문화적 상징(청사초롱, 가마, 비단 장식 등)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공간의 의미를 강화했다. 특히 관객을 하객으로 설정하는 연출 구성과 맞물려 무대는 단선적 관람 공간이 아니라 몰입형 경험의 장으로 작동한다.

조명(정구홍)과 음향(권수범)은 감정의 전환과 장면의 흐름을 밀도 있게 조율하며, 일종의 '시각적 리듬'을 형성한다. 조명은 전통 촛불, 청사초롱 등 조선 시대의 조명을 모티프로 삼아 서사적 분위기를 구축하며, 음향은 공간감을 확장시켜 잔치의 들썩임부터 은밀한 대화까지 다층적 음향설계를 구현한다.

무대 위의 몸짓 역시 잔치를 이끄는 주요한 서사 언어다. 안무가 송희진은 한국무용의 흐름과 현대무용의 움직임을 절충해 배우들에게 공간을 리듬화하는 움직임을 부여했고, 이는 극의 리듬과 감정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시청각적 상승효과를 만든다. 잔치 장면의 리드미컬한 군무와, 인물 간의 서사적 갈등이 격화되는 순간의 정적인 동작 대비는 이 작품이 가진 안무적 서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결과적으로 '청사초롱 불 밝혀라'는 전통 혼례라는 문화적 소재를 바탕으로 하되,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구성하는 모든 기술적 요소 ― 음악, 무대, 조명, 안무 ― 를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단지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무대 언어를 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청사초롱 불 밝혀라'는 전통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전통이라는 익숙한 형식을 빌려 오늘의 이야기를 하고, 제도와 규범의 이름으로 사랑을 가둘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동시에,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한 감정의 실존을 기꺼이 무대 위로 불러올 용기를 보여준다. 이는 연말이라는 시기의 정서적 공명과도 맞닿는다. 사랑과 축복, 연대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공연은, 사회적으로 가장 배제되기 쉬운 감정들을 조명하며 공연예술의 윤리적 가능성을 묻는다.

국립정동극장에서 펼쳐질 조선판 웨딩 잔치는 하나의 공연이면서, 공동체가 서로를 축하하고 지지하는 연습이다. 우리는 누구의 사랑도 가볍게 말하지 않아야 하며, 누구의 축복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청사초롱 불 밝혀라'는 그 마음을 예술이라는 언어로 전하고 있다. 전통의 옷을 입은 새로운 무대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감정의 진심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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