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힌준 기자= 라오스 최남단에 위치한 참사팍주의 작은 도시 팍세에서, 한국인 두 명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남자 — 한 명은 회계사 출신 데이터 분석가, 다른 한 명은 브라질에서 돌아온 전직 선수이자 지도자 — 가 만나 라오스 프로축구 무대에 ‘혁신’이라는 단어를 새기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엄태욱 전력분석관과 박원익 수석코치, 그리고 그들의 무대는 참파삭 아브닐 FC다.
■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 회계사에서 전력분석관으로
엄태욱 전력분석관은 3년 전만 해도 평범한 재무회계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2022 카타르 월드컵 현장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이 제공한 데이터 리포트를 보고, ‘숫자로 축구를 분석한다’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다.
그는 회사원을 그만두고 축구 전력분석의 길로 뛰어들었다. 시흥시민축구단에서 시작해 영국 유학을 거쳐, 결국 라오스 참파삭 아브닐 FC의 제안을 받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언어였습니다. 영어가 가능한 선수가 단 한 명뿐이어서,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공통 언어’라는 말처럼, 몸짓, 눈빛, 표정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더군요. 조금씩 라오스어를 배우면서 선수들과 직접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지금은 소통 자체가 훈련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언어보다 중요한 게 ‘이해’였어요. 선수들의 눈빛, 움직임, 표정이 다 데이터가 됩니다. 저는 축구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자라온 환경, 성격, 성향을 이해해야만 그들에게 맞는 피드백을 줄 수 있습니다."
엄 분석관은 단순히 수치를 나열하지 않는다. 상대의 트랜지션 패턴, 터치 횟수, 압박 타이밍까지 세밀히 기록하고 분석해, 선수들에게 ‘보이는 전략’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경기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선수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생각을 존중한 뒤 맞춤형 피드백을 주는 것입니다."
그의 분석 리포트 한 장이 실제 경기 결과를 바꾸는 순간, 라오스 선수들은 비로소 ‘데이터의 힘’을 믿게 됐다.
■ “브라질에서 배운 건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 박원익의 지도법
박원익 수석코치는 ‘이론형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15살에 홀로 브라질로 떠났고, 현지 클럽에서 선수로 뛰며 공부했다.
이후 K리그에서 피지컬 코치, 통역, 전술보좌까지 맡으며 지도자의 기본기를 다졌다. 그리고 지금, 라오스의 그라운드에서 그는 ‘현장형 멘토’로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전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축구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공정, 공평, 존중 — 이 세 가지는 어떤 전술보다 강력한 팀의 무기죠.”
그는 훈련장을 구역별로 나누어 세밀한 전술 약속을 주입하고, 선수들에게 ‘우리만의 색깔’을 지키라고 강조한다.
“상대를 따라가는 팀이 아니라, 우리 축구를 완성해가는 팀이 되고 싶어요.”
■ 라오스 리그에 ‘한국식 시스템’을 이식하다
참파삭 아브닐 FC는 지금 라오스 리그에서 가장 실험적인 팀이다.
FITOGEHTER GPS로 모든 선수의 피지컬 데이터를 기록하고, 드론과 캠코더로 훈련 장면을 촬영하며, 매 경기 전 ‘비디오 분석 미팅’을 진행한다. 라오스 리그에서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 팀은 단 한 곳뿐이다.
그 덕분일까. 올 시즌 초반 5경기에서 단 3실점만 허용했다. 한때 다실점으로 고전하던 팀이, 이제는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불린다. 엄태욱 분석관은 이를 두고 “데이터는 선수들에게 확신을 준다”고 말한다.
박원익 코치는 “훈련장에서 흘린 땀의 양이,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현재는 영상 분석이 중심입니다. 예를 들어, 살라반 유나이티드전을 준비할 때는 상대가 트랜지션 이후 3터치 이하로 공격을 전개하는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3터치 전에 압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제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분석은 선수들에게 확신을 주고 경기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엄태욱 분석관)
■ 라오스 축구의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
“솜짜이는 전술 이해도가 두 배로 늘었고, 씨비는 공중볼 경합에서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엄 분석관의 말이다.
박 코치는 폴라웅, 캄상가, 폰판찬, 콰이쳉 네 선수를 꼽는다. “특히 폴라웅은 대표팀과 클럽을 병행하면서 스스로 리더십까지 갖췄어요.”
이들의 성장 곡선은 곧 팀의 발전 그래프이기도 하다. 한국 지도자들이 심은 ‘자율적 사고, 데이터 기반 피드백, 위닝 멘탈리티’가 선수들의 훈련 태도를 바꾸고 있다.
“라오스 축구가 한 단계 성장하려면 유소년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엄태욱)
“프로-유스 연계, 지도자 양성, 그리고 대표팀의 철학. 그게 핵심이에요.”(박원익)
두 지도자의 시선은 단순히 팀의 성적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라오스 축구의 생태계 자체를 고민하고, 한국식 시스템을 현지에 맞게 조정하며 전파하고 있다.
엄태욱 분석관의 목표는 “참파삭 아브닐 FC가 국제무대에서도 통하는 시스템 팀이 되는 것"이다. 박원익 코치의 꿈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라오스 구단이 한국 팀과 맞붙는 날을 보는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 라오스는 ‘경험의 끝’이 아니라 ‘도전의 시작’이다. 한 사람은 숫자로 축구를 읽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으로 축구를 가르친다. 그리고 둘은 지금, 라오스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혁명을 만들어가고 있다.
참파삭 아브닐 FC는 오는 10월 19일 오후 6시(한국시간), 리그 선두 영 엘리펀츠 FC와의 맞대결을 앞두고 있다. 현재 리그 5위. 하지만 그들의 분석과 땀, 그리고 철학은 단순히 ‘승점 3점’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라오스 축구가 한국식 열정과 시스템을 통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팍세의 하늘 아래서 쓰여지고 있다.
사진=디제이매니지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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