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소녀가 들고 있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사랑과 고통, 환상과 현실, 언어와 침묵, 그리고 사람. 그것은 단지 한 아이의 인생을 담은 여행 가방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증명해내야 했던 ‘약자’의 생존 가방이었다.
오는 19일 오후 5시, 안산 소극장 보노마루에서 선보이는 김보람의 '판소리 1인극 ANNE'은 판소리라는 전통예술을 통해 한 시대를 건너온 소녀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맞닿게 만든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전 소설 '빨간머리 앤'을 원작으로 삼아, 경기문화재단의 2025 경기예술지원 ‘기초예술 창작지원’에 선정된 이번 작품은 단지 ‘고전의 각색’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판소리라는 고유한 미학 속에서 언어와 정체성, 성장과 저항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풀어낸 동시대적인 시도다.
소녀 앤이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말’뿐이었다. 그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고, 말로 차별을 밀어내며, 말로 세상을 설득했다. 판소리는 그런 앤의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다. 창(노래), 아니리(말), 발림(몸짓)으로 구성된 판소리는 곧 말의 예술이자 삶의 기술이다. 김보람은 이러한 판소리의 언어성과 형식미를 적극 활용해, 단지 한 소녀의 성장담을 넘어, 모든 시대의 '앤들'에게 말을 건다.
김보람은 이번 작품에서 작창에도 직접 참여하며, 작품 전체의 결을 섬세하게 조율했다. 그가 붙인 장단과 말맛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는 기술’이 아닌, 서사의 감정선을 직조해내는 예술로 작동한다. 연출은 최용석(현 남원시립국악단 예술감독)과 박지희 연출가가 공동으로 맡았고, 유선후 안무가는 움직임을 통해 극의 정서를 확장시켰다. 음악감독 김승진은 '무겁지 않은 소녀의 가방'처럼 경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악으로 극의 메시지를 완성도 높게 뒷받침한다.
'판소리 1인극 ANNE'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구의 말이 들리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언어로 서로를 구원하고 있는가". 앤의 이야기는 허구의 고전 속 서사가 아니라, 여전히 말할 수 없도록 강요받는 오늘날의 수많은 '앤들'의 이야기다. 학교, 가정, 사회, 그리고 예술계까지 여전히 누군가는 말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말로 인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지워지고 있다.
최용석 연출은 이번 작품을 ‘소녀의 작은 가방 안에 사랑과 행복, 그리고 사람이 쌓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사회의 가장 작은 존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김승진 음악감독이 말한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앤의 발랄함'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 살아가고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은 오래전부터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판소리 또한 그렇다. 사랑과 연민, 분노와 저항,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판소리의 서사는 언제나 '말할 수 없던 이들'의 이야기였다. 김보람의 '판소리 1인극 ANNE'은 바로 그 전통 위에서, 지금 이 시대의 말과 삶을 다시 묻는다.
앤의 가방처럼, 이 공연은 가볍다. 그러나 동시에 무겁다. 그 안에는 하나의 삶, 하나의 목소리, 그리고 사회를 향한 조용한 외침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의 말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까?"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