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무대는 때로 문학보다 더 깊이 인간을 응시한다. 국립정동극장의 창작 프로젝트 ‘창작ing’의 아홉 번째 작품, 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는 무대라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존재와 고독, 그리고 이름 없는 시간들을 밀도 있게 포착한다. 한 노년의 여성이,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나’로서 세계와 마주하려는 용기 있는 선언이 그 안에 있다. 연극은 여성, 나이, 존재라는 화두를 조용하지만 예리하게 꺼내 들며, 관객 각자의 밤을 건드리는 사유의 흔적을 남긴다.
10월 27일부터 11월 11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무대에 오르는 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는 70대 무명 소설가 윤숙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삶의 가장 내밀한 지층을 더듬는다. 윤숙은 오랜 시간 타인의 서사 속에 머물렀던 인물이다.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 사모님으로 불리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타자의 호명에 머물지 않고 ‘나’로서의 존재를 세상에 선포하려 한다.
그녀가 장기 투숙 중인 호텔은 단지 거처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고독과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공간이다. 매일이 떠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지워진 이 호텔에서 윤숙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사유의 여정을 시작한다. 삶의 말갛고 쓸쓸한 밤, 무화과를 입에 넣으며 되뇌는 질문들. 그것은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심연을 건드리는 존재의 질문이기도 하다.
극은 한 노년 여성의 회상이나 고백으로 읽히지 않는다. 작가 신효진과 연출가 이래은의 협업은, 나이 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리를 정면으로 탐구한다. ‘모든’, ‘다른 부영’, ‘툭’ 등을 통해 한국 사회 속 고립된 인물들을 섬세하게 포착해온 신효진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성의 고정된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래은 연출가는 지난 2023년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통해 감정의 결을 집요하게 좇는 연출 세계를 보여주었고, 이번에도 정동극장과의 지속적인 인연 속에 다시 한번 밀도 높은 무대를 선보인다.
윤숙이라는 인물은 무대 위에서 단지 나이 든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벗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형상을 그려낸다. 그녀의 여정은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싸움이며, 그 고집스럽고도 아름다운 투쟁은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연극 '밤에 먹는 무화과'는 고독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 윤숙의 침묵과 말, 눈빛과 걸음 하나하나가 무대 위에 잔잔히 퍼질 때, 관객은 어느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작품은 단순한 감동이나 공감 너머, 관객 각자의 내면을 조용히 두드리는 ‘밤의 질문’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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