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왜 자유를 원하는가. 권력이나 시장의 요구에 맞추는 순간 예술은 숨을 잃는다. 자유는 존엄이며 허용된 표현만 허락되는 사회는 예술을 장식품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국가는 예술을 길들이려 한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을 풀고 성과와 관객 수를 들이대며 관리 가능한 창작만 선호한다. 그럼에도 지원은 필요하다.
시장만으로는 예술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시가 아닌 기반이다. ‘배고파야 예술가’라는 신화와 ‘상업적 성공만이 지속가능’이라는 통념은 창작을 왜곡한다. 자유와 열망으로 무명 시절을 버틴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예술이 존재한다. 씨 뿌림과 열매 맺음의 과정은 생략할 수 없다. 정책은 이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창작을 뒷받침해야 한다.
얼마 전 ‘낭만합격’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 잠시 생각이 멈췄다. 단순히 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역시 설명을 듣고 나니 감흥의 다른 말이었다. 과정의 짜릿함, 나만의 추구, 현실적 기준보다 감성을 중시, 즉 ‘멋있다’는 뜻을 담은 새로운 표현이었다. 경쟁과 압박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를 잃지 않으려는 세대의 감각이 담겨 있었다. 예술과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답과 효율만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낭만합격’할 수 없다.
1980~90년대 초반 홍콩 누아르에 열광하고 90년대 노상에서 퍼지는 인기 가요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감각을 공유했다. 90년대 중반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찬란한 시작, 한류 열풍,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연대, 거리를 밝힌 촛불의 기억은 모두가 주인공이 된 경험의 장이었다. 공동체가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자유의 열기가 만든 감동이었다.
낭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늘 고독했다. 오늘날 세계적 예술가들도 무명과 결핍 속에서 버텼다.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다면 오늘의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정책은 그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중앙은 원칙을 세우고 지자체는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 즉, 중앙·광역·시·군 정책이 지역 특수성을 존중하되 큰 틀에서 방향을 함께하지 않으면 새로운 물결은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정책은 중앙·지자체뿐 아니라 현장과 행정, 창작자와 사회가 함께 호흡하는 생태계로 작동해야 지속될 수 있다.
화려해 보이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현주소는 참담하다. 영화, 드라마, 연극, 전시, 신인 발굴과 꾸준한 육성 프로그램의 결핍 속에서 투자 중단과 예산 삭감, 창작자 부당 보상이 만연하다.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의 부족과 지원의 불균형 속에서 예술은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직된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멋있을 수 있는 기회’, 즉 낭만을 상상하고 펼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정책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예술의 자유와 낭만을 현실에 담아내야 한다. 대담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살아야 낭만이 숨 쉬고, 낭만이 숨 쉬어야 자유가 의미를 가진다. 정책이 그 숨결을 보호할 때 다음 세대는 말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 하나의 낭만합격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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