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창덕궁 낙선재가 제11회 궁중문화축전 ‘낙선재 100년의 시간과 풍경’을 계기로 오랜 세월의 문을 열었다. 연휴 기간(10월 8일~10월 12일) 동안 일반에 개방된 낙선재에는 매일 수천명의 시민들 발길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행사로 11회기를 맞아 낙선재에서 개최된 올해 궁중문화축전은 보고 즐길 거리가 많은 K-문화 콘텐츠의 위상을 선보였다. 낙선재 입구 격인 수강재 마당에서는 궁중전통 칠교놀이와 궁중머리땋기, 칠보공예 시연 등 참여 프로그램이 진행돼 인산인해를 이뤘고 낙선재 내부, 석복헌, 수강재에는 각 공간별 큐레이터가 상시 배치돼 눈과 귀가 즐거운 관람 분위기가 이어졌다.
해당 행사는 낙선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짚고, 이곳에 머물렀던 대한제국 황실의 세 여인(순정효황후·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덕혜옹주)의 삶과 정신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의의를 뒀다. 행사가 개막한 전날부터 이날까지 1만명이 훌쩍 넘는 인파가 낙선재를 찾았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낙선재 공간에 전시돼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낙선재가 동시대와 맞닿아 있음을 시민들에게 체감하게 했다.
빈석주 작가의 수묵담채화 ‘상념’은 대한황실의 유교적 정신과 품격 높은 미감을 드러냈으며, 장원숙 작가의 ‘덕혜옹주 유치원 시절’은 덕혜옹주의 유년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복원해 그녀가 한때 사랑받았던 존재였음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밖에도 장애인 지원에 힘썼던 의민황태자비의 뜻을 기념하고자 발달장애 아티스트 4인(공윤성·권한솔·김예슬·황성제)의 다채로운 작품이 전시됐다.
해방과 한국전쟁에 거쳐 오늘에 이르는 낙선재의 세월을 담은 이번 행사는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주최하고 국가유산진흥원과 대한황실문화원이 공동 주관했다.
슬픈 품격의 공간 ‘낙선재’...시민과 외국인 관람객 사로잡다
100년의 시간이 깃든 창덕궁 낙선재는 이번 궁중문화축전을 통해 시민과 외국인 관람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전시와 해설 프로그램 속에서 방문객들은 낙선재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황실 여성들의 슬픈 역사와 강인한 삶을 마주했다고 증언했다.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서원익(13)군은 “낙선재가 원래는 멋지고 화려한 장소인 줄 알았는데, 직접 와서 보니 슬픈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란 걸 알았다”며 “특히 문의 모양과 문양이 아름다웠다”고 감상했다.
그가 이번 행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지목한 인물은 덕혜옹주였다. 원익군은 “옛날 사진을 복원한 것인데도 덕혜옹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서원익군과 동행한 박한지(43)씨는 궁중문화축전 방문을 위해 원주로부터 먼 걸음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복궁은 자주 가봤는데 낙선재는 그와 달리 순수하면서도 아름답고 편안한 느낌”이라며 “낙선재에 기거했던 세 인물의 내면을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전시를 지나가듯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계신 도슨트분들이 작품과 시설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더 집중할 수 있었다”며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전칠기를 만들고 장애인을 도운 의민황태자비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크로아티아에서 관광 온 나타샤(55)씨는 “이런 행사가 있는지 몰랐다. 한국 역사 드라마에 관심이 많아 창덕궁을 구경 왔다가 행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좋은 가이드분들이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감탄했다.
나타샤씨가 한국의 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드라마 환혼(2022·Alchemy of Souls)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동양 문화는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궁은 정말 섬세하고 독특하다. 특히 낙선재는 아주 시적이고 평화로우며 철학적인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의민황태자비의 자혜학교...낙선재에서 100년의 뜻을 기리다
낙선재는 ‘선을 즐기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공간으로, 선하고 곧은 삶을 추구했던 대한제국 황실 세 여인의 심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소다. 그 선한 삶의 대표적 실천 사례가 바로 의민황태자비의 자혜학교 설립이다. 이는 당시 열악했던 국내 복지시설과 특수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장애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추진한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자혜학교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낙선재를 방문해 궁중문화축전 해설을 듣고 전통 예절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총 일곱 가족이 참여해, 해설 교육 프로그램 참가 이후 수료증을 받았다. 수료증은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황제의 증손인 이원(李源) 황사손이 각 학생들에게 직접 수여했다.
자혜학교에 재학 중인 10세 딸아이와 함께 낙선재에 동행한 이윤경(40대)씨는 “자혜학교에서 초대를 받아 낙선재에 방문하게 됐다”며 “아이 교육 때문에 방문하게 된 셈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피부로 와닿는 경험을 하는 느낌”이라며 웃었다.
윤경씨는 “의민황태자비님 동상은 학교에서 늘 봤는데 그 의미를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며 “낙선재에서 친절한 안내와 역사절 설명을 들으니 ‘참 대단한 분이 우리 학교를 설립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짚었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이끈 자혜학교 조미영 교장은 “의민황태자비님은 자혜학교의 시작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장애인 복지가 전무했는데, 직접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사단법인 자행회를 설립하시고 1973년에 특수학교를 만드셨다”고 설명했다.
사단법인 자행회는 특수학교, 재활원, 직업재활센터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낙선재 100년의 시간과 풍경’ 행사를 비롯해 한일공동세미나 및 조형물 제막식, 미술 공모전 및 전시회, 스포츠 축제 등을 개최하며 올해를 ‘이방자 여사(의민황태자비) 기념의 해’로 지정했다.
조 교장은 “의민황태자비님이 이곳에 기거하실 땐 개방된 공간이었는데, 돌아가신 이후 쭉 닫힌 공간이었어서 아쉬웠다. 낙선재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 것도 굉장히 드문 일”이라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던 공간인 만큼 이번 행사가 의미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낙선재’,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황실 정신 이어가야
행사를 주관한 대한황실문화원 이관주 위원장은 “그동안 낙선재는 오랫동안 ‘빈 궁궐’로만 인식돼 왔다”며 “이번 행사를 통해 황실 여성들의 생활상과 유품, 그리고 사회활동을 조명함으로써 시민들에게 낙선재를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특히 의민황태자비처럼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또 “이번 행사는 지난 100년의 근현대사를 되짚으며 과거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다”며 “대한황실문화원은 앞으로도 후손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과 정신을 바탕으로 문화를 계승해 나갈 수 있도록 이러한 행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계획”이라고 전망했다.
대한황실문화원의 총재이자 고종황제의 증손인 이원 황사손은 2005년 이구 황세손 서거 이후 상주로서 3년상을 지내며 낙선재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이원 황사손은 “순정효황후, 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지켜낸 분들”이라며 “그들의 삶은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헌신,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고난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특히 의민황태자비는 결혼 이후 한국의 복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셨다”며 “대한황실문화원은 향후 자혜학교와의 지속적인 문화행사를 통해 후원관계를 지속해 가겠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법통을 이은 황사손으로써 2005년 이구 황세손 3년상 이후 낙선재에서 이번 이번 행사를 준비하기까지 약 20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창덕궁과 낙선재가 모두 보물로 지정된 만큼 단기간의 공개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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