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전시관] 일요일의 회화, 혹은 파괴의 기쁨...이페로 개인전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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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전시관] 일요일의 회화, 혹은 파괴의 기쁨...이페로 개인전 'Sunday'

뉴스컬처 2025-10-07 06:00:00 신고

[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가끔 일요일은 너무 조용해서 불안하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쉬어도 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한 그런 날. 이페로(Epäro) 작가의 개인전 ‘Sunday’는 바로 그런 감정의 교차점을 시각화한다.

안정과 자유, 정적과 돌발, 완성과 파괴가 한 화면 안에서 맞부딪히는 회화의 지형 전시를 보고 나면 이페로 작가의 그림을 회화라는 형식 안에 가두기가 어렵다. 그것은 차라리 ‘생성의 반복’이라 해야 정확하다.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는 수년간 ‘스와이프 아웃(Swipe Out)’이라는 연작을 통해, 정물의 형상을 지우는 회화적 실험을 계속해왔다. 단순한 캔버스 위의 지우기가 아니다. 마치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듯, 세밀하게 쌓아 올린 형상을 갑작스레 파괴해버리는 일종의 의식적 무질서다. 중요한 건, 그 지우기가 단순한 부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페로 작가의 작업은 ‘지움’과 동시에 무언가를 ‘드러내는’ 기묘한 운동성을 품고 있다.

이번 전시 ‘Sunday’는 그 운동의 방향을 한층 확장시킨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의 회화가 더 이상 완성과 소거 사이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서의 회화적 태도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을 완성에 가까운 정물로 메워놓고, 그 위를 한순간의 붓질로 밀어내는 행위는 어떤 쾌감을 동반한다. 그 쾌감은 관람자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지우기의 쾌감,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의 탄생,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형태들. 이는 단순히 '망가뜨린다'는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형의 또 다른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몸짓이다.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흥미로운 것은 이페로 작가가 출발점으로 삼는 소재가 ‘정물’이라는 점이다. 정물은 원래 정적이고 안정적이다. 반복적인 손질과 인내의 시간을 견디면, 결과가 보장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페로 작가는 그 정물 위에 즉흥적인 선을 덧그음으로써, 의도와 우연, 계산과 감각이 충돌하는 낯선 시간의 층을 만든다. 안정과 해방, 정지와 돌발이 겹쳐진 이 회화적 시간은 마치 일요일의 정서와 닮아 있다. 휴식 같지만 긴장되고, 느슨하지만 그만큼 예민한 감각이 깃든 하루.

작가는 때때로 자신이 “무용에 가까운 노력”을 들여 정물을 만들고, 그걸 우발적으로 파괴한다고 말한다. 리히터의 흐림, 라우셴버그의 지우기처럼 현대미술의 담론 속에서도 ‘파괴’는 낯선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이페로 작가는 정교함의 절정에서 그것을 밀어내는 데서 오는 감정의 진폭을 건드린다. 이것은 감상자의 심리에도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낯선 쾌감, 파괴가 아닌 생성으로서의 지움.

또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선 중심의 드로잉 작업도 함께 선보인다. 드로잉은 완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떠도는 사유와 감각의 기록이다. 드로잉을 따로 분리해 보여주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화면에서 덧그어진 선들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별개의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물의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흐름.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꿈꾸는 무위(無爲)의 상태와도 연결된다. 동양의 사유처럼, 형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 그 자체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의 작업을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로 이해하는 것도 유의미하다. 오래된 글 위에 새로운 문장이 덧쓰이고, 또 그 위에 다시 시간이 누적되는 구조. 그의 화면은 그렇게, 기억과 망각, 생성과 소거가 얽힌 시간의 지층이다. 때로는 몇 해 전에 그려놓은 미완의 캔버스를 다시 꺼내, 새로운 감각으로 덧칠하기도 한다고 한다. 회화는 멈추지 않고, 되풀이되고,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결국 'Sunday'는 어떤 메시지의 도출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하나의 출구가 아니라, 또 다른 무형의 입구로 이어진다. 익숙함을 밀어낸 자리, 그 낯선 공간에서 회화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이페로 작가의 개인전 'Sunday'는 오는 9일부터11월 1일까지 라흰갤러리에서 열린다.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포스터. 사진=라흰갤러리
이페로 작가 개인전 '선데이' 포스터. 사진=라흰갤러리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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