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압도적 존재감으로 스크린 지배하는 연기의 제왕
배우 이병헌은 이름 세 글자만으로 신뢰를 주는 배우다. 드라마부터 영화까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그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을 작품 앞으로 끌어모은다. 반짝인기도 아니다.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35년간 이병헌이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는 끊임없는 도전과 변신의 기록이다. 한 장르나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 폭넓은 연기력으로 멜로, 액션, 드라마, 사극, 코믹 장르까지 소화하며 믿고 보는 명품 배우이자 연기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
스크린과 브라운관 넘나드는 ‘연기 장인’
이병헌의 데뷔와 동시에 KBS 대하드라마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로 처음 얼굴을 알렸고, 1992년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 뭐든지 잘하는 만능 대학생 역으로 나와 청춘스타로 발돋움했다. 이후 ‘아스팔트 사나이’와 ‘해피투게더’, ‘아름다운 날들’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고, ‘올인’, ‘아이리스’ 등의 대작 역시 성공시키며 한국 드라마 업계의 규모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유진 초이 역으로 안방극장 시청자들을 울리며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배우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왔다는 점이다. 1995년 ‘런어웨이’를 통해 충무로에 데뷔한 그는 초기 네 편 연속 흥행에 실패하난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99년 ‘내 마음의 풍금’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육군 유엔사령부 경비대대 병장 이수혁 역으로 열연해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후 2001년에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죽음을 뛰어넘은 운명적 사랑을 애절하게 연기한 데 이어 2005년 ‘달콤한 인생’에서 냉철한 완벽주의자 선우 역으로 누아르의 아이콘으로 발돋움했다. 2006년에는 다시 멜로작 ‘그해 여름’을 맡아 싱그럽지만 안타까운 순애보를 연기하는 등 이병헌은 작품 흥행 여부에 상관없이 늘 새로운 도전을 추구해왔다.
2010년대 들어 연기력에 완전히 물이 오른 그는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왕과 광대의 1인 2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이병헌만이 가능한 사극 연기라는 극찬을 받았고, 2015년 ‘내부자들’에서는 정치와 권력의 음지를 파고드는 정치 깡패 역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이외에도 201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마스터’, ‘남한산성’, ‘그것만이 내 세상’, ‘남산의 부장들’, ‘콘크리트 유토피아’, ‘승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굵직한 궤적을 남겼다.
할리우드 진출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이처럼 변화와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장르와 플랫폼을 넘나드는 연기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자리를 확고히 한 이병헌은 ‘믿고 보는 배우’를 넘어 ‘가장 강력한 이야기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그는 지금의 글로벌 한류 열풍이 불기 전부터 일찌감치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스티브 소머즈 감독의 블록버스터 ‘지.아이.조’에서 스톰 셰도우 역으로 출연해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이후 알 파치노, 앤소니 홉킨스 같은 저명 배우와 함께한 범죄드라마 ‘미스 컨덕트’를 비롯해 전 세계 매출 1억 6,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흥행한 ‘매그니피센트7’, ‘레드: 더 레전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까지 연이어 출연하며 해외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16년에는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K드라마 열풍의 시발점인 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서는 반전의 핵심 프론트맨 황인호 역으로 등장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이끌었다. 이병헌은 권력자의 단단한 아우라 속에 스며든 미세한 균열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극 전체의 긴장감을 이끌었다. 특히 냉철한 운영자의 얼굴부터, 동생과 아이를 향한 온기까지 절대자의 권위와 인간적인 여운이 공존하는 프론트맨을 완성해내며 서사와 감정을 동시에 밀도 있게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글로벌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귀마 역을 한국어, 영어로 목소리 연기를 펼치며 힘을 보탰다. 짧은 등장에도 근엄하고 낮은 목소리로 극의 무게감을 잡으며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이외에 단독 제작 영화로 북미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에서 찰스 디킨스를 목소리로 연기하며 국내 관객을 만날 준비를 앞두고 있다.
작품마다 ‘마스터’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이병헌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최근 제29회 부천국제영화제(BIFAN) 이병헌 배우 특별전 ‘더 마스터: 이병헌’ 기자회견에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의 처지 또한 다르다. 제가 언제 어떤 인물을 연기할지 모르니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사람들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을 관찰하고 추측하면서 답을 찾아간다. 그게 정답이 아니더라도, 내 안에 확신을 갖고 생각하는 게 연기자로서 공감대를 넓히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연기에 대한 자세를 밝혔다.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박찬욱 감독과 협업
한편 이병헌은 신작 ‘어쩔수가없다’에서 또 한 번 압도적인 연기 내공을 선보인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제목 그대로 인간이 처한 불가피한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 1997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로부터 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됐던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 도끼)’를 원작 삼아 영화로 각색했다. ‘거장’ 박찬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이병헌과는 ‘공동경비구역 JSA’, ‘쓰리, 몬스터’에 이어 박찬욱 감독과 세 번째 작업이다.
그간 복수와 욕망 등 주로 추상적 개념을 탐구했던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선 노동과 생존이란 보다 구체적인 현실로 시선을 옮겼다. 박 감독은 우리 시대의 구조적 모순을 포착, 노동자의 존엄이 어떻게 소거되는지 보여주고, 현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 사회적 불안을 직시한다.
작품에서 이병헌은 회사에 25년을 헌신했으나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가장 ‘만수’ 역을 맡았다.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만수가 갑작스러운 실직 속에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어렵게 마련한 집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을 담아낸다. 이병헌은 절박함과 어설픔이 뒤섞인 인간적인 면모를 디테일하게 표현하며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이나 분량의 상당수는 이병헌이 독차지한다. 하지만 이것이 의아하지 않은 이유는 이야기의 구조뿐만 아니라, 모든 분량을 적절하게 소화해낸 베테랑 이병헌 덕분이다. 러닝타임 내내 그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밀도 높게 담아내며 중년 가장의 절박함과 분노, 무너져가는 자존심을 잘 나타냈다. 특히 아내 ‘미리’ 역을 맡은 손예진과는 처음 호흡을 맞추었음에도 위기 속에서 서로를 붙잡는 현실적인 부부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어쩔수가없다’는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돼 관객과 평론가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어진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신설된 국제관객상의 첫 수상작이 됐다. 이병헌 역시 특별공로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 배우가 특별공로상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여기에 내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 장편 부문의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되었고,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아시아에 처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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