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윤정 기자] “아버지가 조수석에 앉은 아이들한테 지도를 보여주며 ‘우리가 지금 여기쯤 와 있단다’라고 말해주던 게 참 흔한 풍경이었죠. 추석·설이 다가오면 전국 서점이나 휴게소에 저희 도로지도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우리 직원들은 밤낮없이 인쇄하고 포장하느라 바빴습니다. 말 그대로 ‘비상 체제’에 돌입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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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이데일리와 만난 조해용 중앙지도 대표는 종이지도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자동차가 있는 집이라면 도로지도 한 권은 필수로 챙겨야 했고, 명절 귀성길 차 안에서 지도를 펼쳐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장면은 흔했다. 도로지도는 단순한 길 안내 도구를 넘어 온 가족이 함께 고향 가는 길을 확인하는 설렘의 매개체였다.
◇디지털 길 정보 없었던 1990년대…온 가족 길잡이였던 종이지도
이런 풍경은 판매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 대표는 1990년대를 두고 지도가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인터넷으로 길 정보를 얻을 수 없던 때라 자가용이 있는 집이라면 도로지도 한 권쯤은 필수였다. 판매량은 추석·설을 앞둔 한두 주 동안 평소의 수십 배로 뛰었다. 회사 전체가 비상 체제로 전환돼 인쇄소는 밤낮없이 돌아갔고, 직원들은 늦은 밤까지 포장과 배송에 매달렸다. 전국 서점 계산대 옆,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도로지도가 산더미처럼 쌓여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966년 창립한 중앙지도문화사는 귀성길 동반자였던 전국도로지도는 물론 대도시 상세지도, 행정구역도, 관광지도, 국가 정책용 국토종합계획도 등 사실상 ‘지도의 모든 것’을 제작하며 국내 최대 지도 제작·판매사로 자리 잡았다. 1971년에는 국토지리정보원으로부터 정부지도 판매 대행업체로 지정돼 한진지도와 함께 전국에서 단 두 곳만 허가받은 총대리점이 됐다. 조 대표는 “국가공인 측량 기술자, 정밀 인쇄 설비, 국가정보 보안 관리 능력까지 모두 갖춰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며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하며 지도 산업을 선도해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없어서 못 팔던 종이지도…네비·스마트폰 확산에 쇠퇴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내비게이션이 차량 필수 옵션으로 자리 잡으면서 종이지도 부문 매출 감소가 시작됐다. 2010년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쇠퇴는 걷잡을 수 없었다. 조 대표는 “명절 대목을 기대하며 공급했던 물량이 팔리지 않고 반품돼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종말을 체감했다”며 “사람들은 더 이상 지도를 찾지 않았고, 지도가 놓인 자리는 최신 IT 기기나 다른 상품들로 대체됐다”고 했다. 시대 흐름 앞에서 종이지도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기다. 결국 회사가 마지막으로 발행한 전국 도로지도는 2018년판이었다. 이후로는 새로운 종이지도를 제작하지 않고 사업 방향을 디지털 중심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종이지도가 시장에서 사라진 근본 원인에 대해 조 대표는 편의성과 실시간성의 차이를 꼽았다. 종이지도는 한번 인쇄되면 정보를 수정할 수 없지만, 디지털 지도는 새로운 도로나 건물을 즉시 반영할 수 있다.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최적 경로를 추천하는 기능 역시 종이지도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는 “기술 발전이 사람들의 정보 소비 방식을 바꿔 놓은 것”이라며 “이는 종이지도뿐 아니라 여러 아날로그 산업이 겪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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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속 인쇄물에서 ‘살아 움직이는 데이터’ 된 지도
중앙지도는 이후 사명에서 ‘문화사’를 떼고 디지털 중심 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변화는 사명 전환에도 반영됐다. 중앙지도문화사라는 사명에는 종이지도를 통해 지식·문화를 전파하던 시대의 자부심을 담고 있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지도의 역할도 달라졌다. 지도는 더 이상 책꽂이에 꽂아두는 인쇄물이 아니라 스마트폰 속에서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이는 데이터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회사는 사명에서 ‘문화사’를 떼고 ‘중앙지도’로 바꾸고 출판업을 넘어 디지털 기반 사업에 무게를 두게 됐다.
현재 중앙지도는 50여명의 국가공인 측량·공간정보 전문가를 주축으로 해 디지털 기반 공간정보 데이터 구축과 인공지능(AI) 활용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환경부 등 주요 기관을 주요 발주처로 두고 있으며, 연 매출은 45억~50억원 규모다. 내년에는 60억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종이지도, 따뜻한 추억으로 남길”
하지만 종이지도가 남긴 자산은 지금도 유효하다. 조 대표는 “종이지도 제작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국토를 오차 없이 축소해 담아내는 정밀 과학의 영역이었다”며 “50년간 축적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지도 제작에 필요한 장인 정신은 큰 자산이 됐다”고 했다. 이어 “아날로그 시대의 경험은 디지털 기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밑거름이 됐다”며 “지형·지물을 정확하게 판독하고 데이터의 미세한 오류를 찾아내는 노하우는 인공위성이나 항공사진 데이터를 분석·처리하는 현재의 공간정보 사업에서도 핵심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 대표는 “책상 서랍이나 자동차 글로브박스 속 빛바랜 중앙지도문화사의 종이지도를 간직한 분들이 계신다면 그 지도가 따뜻한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며 “앞으로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국토를 그려가며 국민 생활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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